배우 김주혁(41)은 MBC '구암허준'을 통해 얻은 것도 잃은 것도 많았다. 그는 아버지인 배우 고 김무생이 드라마 '집념(1975년)'에서 허준을 연기한지 38년 만에 같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전작 MBC '무신(12)'을 찍은뒤 "다시는 사극을 안하겠다"고 말했던 김주혁이 "허준은 나의 운명"이라며 사극을 택한 것도 바로 아버지 때문이었다.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같은 인물을 연기했다는 점에서 허준이란 캐릭터는 김주혁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극 중 허준의 젊은시절부터 노년까지 모두 소화하며 연기 스펙트럼도 넓혔다. 하지만 흘린 땀과 노력에 비해 시청률은 좋지 않았다. 줄곧 한자릿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후반에 겨우 10%를 넘겼다.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많이 힘들었다. 사극을 미니시리즈로 제작해도 생방송처럼 바쁘게 촬영을 하는데, '구암허준'은 심지어 일일극으로 편성돼 어려움이 컸다. 설상가상으로 이 드라마는 15부가 연장되면서 135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6개월 동안 힘든 촬영을 마친후 만난 김주혁은 "매일 찍는 것도 힘든데 연장까지 한다고 했을땐 정말 아무 말도 못 하겠더라. '무신'에 이어 2년 연속으로 사극을 하며 체력적 한계에 부딪혔던 것 같다. 잠을 안자고 35시간 동안 촬영했던 적도 있다. 여가 생활은 꿈도 못 꿨다. 그럼에도 운명같은 작품이었다는 말은 아직 유효하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더욱 최선을 다해서 촬영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김무생·전광렬 등에 이어 5대 허준이 됐다. 이전의 허준 캐릭터와 차별화를 주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
"더 부드럽게 표현했다. 최대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허준의 젊은 시절부터 노년기까지 모두 그려낸 점도 흥미롭지 않았나. 나 역시 허준의 일대기를 모두 보여주다보니 감정 이입이 잘 되더라. 노년 연기를 할 땐 진짜 힘도 쭉 빠지고 서글픈 감정이 올라왔다."
-유독 힘들게 촬영했는데 소감 한마디 부탁한다.
"감옥에 있다가 나온 기분이다. 마치 사회 부적응자가 된 것 같다.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다 나온후 뭘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는 그런 상황이다. 그정도로 이번 드라마는 많이 힘들었다. 지옥 같았다. 촬영 스케줄 표를 보면 허준으로 시작해 허준으로 끝났다. 매회 70%의 분량을 차지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내 스스로 기특하다고 생각하는 건 모든 대사를 다 외우고 컨닝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기를 할 때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호흡을 맞춰야하는데 다른 곳에 대본을 펼쳐놓고 눈을 돌려 컨닝을 하고 싶진 않았다."
-끝까지 버티며 촬영을 할 수 있었던 힘은.
"축구가 날 살렸다. 국가 대표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우리 드라마가 결방됐다. 그 날 하루 스케줄을 비워주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웃음) 그리고 사실 어차피 해야하는 일인데 대충해서 욕을 먹고 싶진 않았다."
-'무신'을 찍고 다시는 사극을 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차기작으로 다시 사극을 택해 의아했다.
"내가 왜 그렇게 장담을 하고 말했을까.(웃음) 그 생각만 하면 민망하다. '무신'을 찍으면서 사극 촬영이 얼마나 힘든지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를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구암허준' 대본을 보고 운명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했던 역할이기 때문에 선택했다. 아직도 운명같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시청률과 편성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이 정도 성과를 올린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에 대한 만족감과 성취감은 50점 이상이다. 원래 3% 시청률이 나오는 시간대인데 10%를 넘겼으면 된거 아니겠나. 사실 이 드라마가 다른 시간대에 방송됐다고 해도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서 편성에 대해서 말하는 건 좀 조심스럽다. 다만 오후 10시 미니시리즈 시간대에 방송됐다면 시청률이 두 배는 나왔을 것 같다."
-현대극에 대한 갈망이 더 커졌을 것 같은데.
"물론이다. 장르에 상관없이 일단 현대물을 하면 즐겁게 촬영할 것 같다. 사극을 2년 연속 찍으면서 정신력이 강해졌다. 두려움도 없어졌다. 지금은 제대한 기분이다. 현대물이라면 무조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가 생활도 전혀 못 했나.
"작품을 하면서 여자랑 차 한잔 못 마시고, 대화 조차 못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시생활'을 못 해봤다. 커피숍에 앉아서 차 한 잔 마실 여유가 없었다."
-드라마 끝나고 가장 하고 싶은 건 뭐였나.
"여행 가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무기력한 상태다. 여행 계획도 하나도 안 짰다. 일단 좀 쉬고 싶다. 뭘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무조건 한 달 동안은 푹 쉴 계획이다."
-다시 솔로다. 연애는 안 하나.
"지금은 연애가 문제가 아니다. 결혼에 대한 압박이 온다. 지금 당장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아이가 스무살이 됐을 때 내가 60살이지 않나. 아이들을 좋아하고 예뻐하는 편이다. 나와 닮은 아이가 내 옆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으면 행복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