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54)은 유명 영화감독 이전에 현 충무로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80년대말 서울극장의 합동영화사 선전부장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후 외화수입·한국영화 제작, 그리고 연출자로 20여년을 훌쩍 넘기며 충무로를 지키고 있다. 감독 데뷔작 '키드캅'(93)을 내놓은 것도 벌써 20년 전이다. 단순히 이준익 감독이 오랫동안 영화계에서 일했다는 것만으로, 혹은 그의 영화사 씨네월드 사무실이 실제로 서울시 중구 충무로의 한 건물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만으로, 또 '왕의 남자'라는 대표작을 내놨다는 것만으로 그를 '충무로의 터줏대감'이라 부르는건 아니다. 치열하게 산업과 온갖 이슈의 중심에 서며 한국영화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지난 2011년 '평양성'의 흥행실패와 함께 은퇴발언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영화인들 중에선 '충무로에 뼈를 묻을 영화인'의 은퇴를 믿는 이들이 없었다. 곧 돌아올거란 예상대로 2년여만에 이준익 감독이 신작 '소원'을 들고 당당히 복귀했다. 아동성폭행사건이란 민감한 소재를 차용해 우려의 시선을 모았지만 결과는 오히려 좋다. 지난 2일 개봉후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일주일만에 100만명을 모았다. 폭로 또는 고발에 초점을 맞추지않고 피해자 가족의 '힐링'에 초점을 맞춘 동화같은 연출로 호평을 끌어내고 있다.
자주 한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이준익 감독과 '소원'의 개봉을 빌미로 또 한번 자리를 마련했다. 솔직하고 거침없는 입담, 물 흐르듯 줄줄 터져나오는 미사여구는 여전했다. 단, 영화 '소원'의 소재 때문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건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복귀 축하한다"는 인사에는 "고맙다"며 반갑게 화답했다.
▶민감한 내용 '소원', 소재 아닌 주제 때문에 선택
-소재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왔을텐데 굳이 복귀작으로 선택한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요.
"연출의뢰가 들어왔는데 막상 시나리오를 읽고 난 뒤엔 차마 거절하기가 미안하더군요. 사실 소재만 봤을땐 저도 연출하기 싫었어요. 그런데 주제를 보면 도저히 안 할수가 없더라고요. 소재 때문이 아니라 주제 때문에 메가폰을 잡았죠."
-비슷한 유형의 영화들이 다루지 않았던 부분들을 '소원'이 담고 있었기 때문인가요.
"맞아요. 피해자들의 '내일'을 보여주는 영화잖아요. 항상 성폭행 사건 등을 접할 때면 누구나 정의감에 불타 한 소리씩 하잖아요. 그러면서 자신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요. 이후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회피해요. 쳐다보지 않는게 도움을 주는거라 생각하죠. 그렇게 되면 피해자들은 절벽으로 갈수 밖에 없어요. 그들이 일상으로 돌아올수 있도록 응원해줘야죠. 그들의 입장에서도 최고의 복수는 '별 일없이 사는 것' 아닐까요."
-이런 주제를 다룬게 처음이라 연출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
"난감했지만 비빌 언덕은 있었어요. 김지혜 작가가 쓴 시나리오의 힘이었죠. 시나리오 자체가 워낙 진실성 있게 완성됐기 때문에 저는 그저 그 주제를 관객 앞에 고스란히 가져다놓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배달부 역할만 한 셈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 배달 자체가 쉽지 않았다는 거예요. 퀵서비스로 따지면 금붕어가 든 어항을 오토바이에 싣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셈이었어요. 중간에 누가 건드리거나 달리다 넘어져 깨지면 어항 속 금붕어가 죽는거잖아요. 얼마나 조심스러웠겠어요."
-첫 시사회 때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정말 살 떨렸겠는데요.
"오랫동안 충무로에서 활동하며 친해진 기자들도 많아요. 보통 제 영화 시사회가 있는 날이면 안부 문자라도 넣어주는 이들이 있거든요. 그런에 이번엔 단 한 명도 연락을 안 주더군요. 은퇴 발언 이후 복귀작인데다 이 예민한 소재의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그들도 장담을 할수 없었던거죠. 다행히 영화를 본 이후에는 반갑게 인사하는 이들이 많았어요. 어떤 기자는 '이런 영화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하더군요."
-설경구·엄지원 두 배우도 시사회 후 간담회 때 눈이 퉁퉁 부어 무대에 올라가던데요.
"둘 다 장난아니었어요. 경구는 언론시사회 전날 아예 잠을 못 잤다고 하더라고요. 시사회 때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자마자 뛰쳐나가더군요. 대기실에 가보니 거울 보면서 얼음을 눈에 대고 있더군요. 펑펑 울었던거예요. 그 상태로 무대에 올라가면 괜히 쇼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신경쓰더라고요. 엄지원도 간담회에 올라가기 전 갑자기 스모키 화장을 하고 나타나는거예요. 영화 컨셉트랑 안 어울렸지만 울다가 부은 눈을 가리기 위해 어쩔수 없었어요."
▶피해자 아빠 역 설경구 감정 잡느라 줄넘기 5500회
-영화 속에 어린이 애니메이션 캐릭터 코코몽을 등장시킨건 어떤 의도였나요.
"참 위험한 시도였죠. 진지하게 잘 나가다가 갑자기 아빠가 코코몽 탈을 뒤집어쓰고 사고를 당한 딸 앞에 나선다는 건데, 설경구도 그 장면을 많이 걱정했어요. 저 역시 비현실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고 무작정 찍은건 아니예요. 그 시점이 사고를 당한 소녀가 일상을 되찾아가는 판타지의 시작이라 보고 최대한 예쁘게 묘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죠. 저는 '소원'이 한 편의 동화처럼 받아들여졌으면 해요. '빅 피쉬'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그런 작품이길 바라는거죠. 만약 이 소재의 영화를 리얼하게 만들라고 했으면 전 연출 안 했을거예요. 촌스러워질수 밖에 없지만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선 어쩔수 없었어요."
-설경구씨도 이 영화에 엄청난 부담감을 안고 참여했다던데요.
"흉흉한 사고를 당한 딸의 아버지 역을 맡아 그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어요. 인물의 심정을 이해하기위해 스스로를 학대하기도 했죠. 촬영이 없는 날에도 지방 숙소에서 김밥만 먹으면서 종일토록 나오지 않았어요. 나중에 알고보니 혼자 줄넘기를 하며 몸을 힘들게 만들고 있었어요. 무려 5500개를 한번에 한 적도 있어요. 그렇게까지하며 감정을 끌어올려 현장에 나왔어요. 경구가 연기하는 모습 보면서 저도 눈물이 나서 혼났어요. 그러다 연기가 좋으니까 괜히 웃음이 나기도 해요. 옆에서 저를 봤으면 미쳤나싶었을거예요. 어쨌든 설경구는 참 존경할만한 배우더군요."
-'조두순 사건'을 모티프로 한 영화잖아요. 이 부분을 마케팅적으로 활용할수도 있었을텐데 홍보 문구 등에 관련 단어를 찾아볼수가 없어요.
"일부러 하지 말자고 했어요. 최초의 시나리오가 '조두순 사건'을 염두에 두고 쓴 건 사실이죠. 하지만, 좀 폭넓게 생각해보면 특정 가족이 아니라 유사 사건을 당한 모든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그런 의미에서 흥행을 위해 피해자들을 부각시키는 건 정말 하기 싫었어요. 최대한 정중하고 겸손한 태도로 접근하려 노력했죠. 마케팅 팀에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단어를 최대한 쓰지말아달라고 부탁했고 괜히 가십만 유발할까봐 제작보고회도 열지 않았어요."
-흥행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컸을텐데 대단하시네요.
"이 영화로 인해 어떤 사회적 현상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마케팅으로 조장하고 싶진 않았어요. 전 기본적으로 영화를 '꿈의 궁전'이라 생각해요. 관객이 영화를 보기 위해 돈을 내는 이유는 그 작품이 품고 있는 꿈을 사기 위함이 아닐까요. 제가 어렸을때 '대부'에 감동받아 몇 차례나 다시 봤어요. 그때부터 '대부'는 제 영화가 된거죠. 제가 영화를 만들어 극장에 걸면 더 이상 그건 제 영화가 아니예요. 제가 표현하고자 했던 꿈을 관객이 돈을 주고 샀으니 그들의 것이죠."
▶2년전 은퇴선언, 철없는 노감독의 말실수
-지난 일이지만 2년전 은퇴 이야기는 도대체 왜 꺼내신 거예요.
"그거 참 난감한 일이었는데. '평양성' 현장공개 때 간담회 분위기가 좀 밋밋하더라고요. 그래서 분위기 좀 살려보자고 '이 작품 흥행실패하면 은퇴하겠다'는 말을 했거든요. 그걸 현장에 있던 기자들이 진짜로 기사화할지는 몰랐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한 기자들과 만날때면 으례 그런 농담도 하거든요. 그날 오신 분들이 제 스타일을 몰라 오해하신거예요. 저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말실수를 한 거고요.(웃음)"
-그 뒤로 트위터에도 직접 은퇴관련 이야기를 남겼잖아요.
"NGO 단체를 통해 몽골에 나무를 심으러 갔을 때죠. 이미 '평양성'은 흥행에 실패했고 물은 엎질러진 뒤였죠. 마침 그 단체에서 자선행사 홍보를 위해 한 마디 남겨달라길래 '제 상업영화 은퇴를 축하해주세요. 저는 나무 심으러 갑니다'라고 썼어요. 그리고 나무 심다가 한국에 돌아왔더니 난리가 났더라고요. 공항에서 처음보는 아저씨가 툭 치면서 '왜 은퇴를 하고 그러냐'고 하더군요.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덕분에 엄청 놀았어요."
-사실 영화계에서는 감독님이 진짜 은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맞아요. 전 어쨌든 은퇴선언을 해버린 상황이라 작품 개발에서 손을 떼고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연출제의는 쉴새없이 들어오더군요. 하지만, 기운이 빠져서 할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소원'을 만난거죠. 제가 제작 또는 시나리오 개발을 하지 않고 순전히 연출만 한건 이번이 처음이예요."
-감독님도 은근히 철이 없으십니다.
"40대까지는 꾸준히 철이 들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사회인으로 살아갈수가 있거든요. 하지만, 그 뒤로는 조금씩 '철'을 빼내야죠. 아니면 고집불통 노인네가 되기 쉽거든요. 제 경우엔 철을 너무 빼내서 철딱서니가 없어진거죠. 그러다 한 방 제대로 맞았으니 이제 조심해야죠.(웃음)"
-'왕의 남자'로 굉장한 기록을 세웠잖아요. 그런 작품을 한번 더 내놓고 싶은 욕심은 없나요.
"글쎄, 이미 저는 40대까지 흥망성쇄를 전부 경험해봤어요. 그러다보니 더 이상 큰 욕심은 없네요. 또 인생이란게 적당한 굴곡이 있어야 사는 맛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무엇보다 영화 일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좋은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어요. 그것만으로 만족해요. 물론, 뭘하든 잘하고 싶고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운이 제게 들어올수 있게 항상 웃고 다녀요. 웃는 사람이 운도 좋다는 말 때문인데, 종일 웃다가 잠깐 인상쓸때 들어오려던 운이 달아날까봐 잘 때도 웃으려고 합니다. 실력있는 사람과 운 좋은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운 좋은 사람이겠죠."
-'왕의 남자'의 천만흥행이 운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영화가 좋다고 그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아주는건 아니잖아요. 그만큼 운도 따랐던거죠. 다행히 전 운이 좋은 편이예요. 은퇴선언했다가 복귀까지 하게 됐잖아요.(웃음)"
-요즘도 오토바이를 즐기시나요.
"물론이죠. 바람이 좋더라고요. 바람이 안 불면 제가 직접 만들면서 그걸 즐기는거죠. 오토바이를 타고 해외일주를 떠나는 프로젝트도 오랫동안 구상해왔어요. 이스탄불에서 파리까지, 그 다음엔 이스탄불에서 압록강까지 가는 뭐 그런거죠."
-꼭 한번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배우가 있다면.
"박해일이예요. 과거 '왕의 남자'때도 함께 함께 해보고 싶었는데 박배우 스케줄이 안 맞아 성사되지 않았죠. 주변에서도 '이감독과 박해일의 궁합이 잘 맞을것 같다'는 말을 많이들 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