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간 오로지 음악을 위해 살아온 가수 패티김(75·김혜자)이 은퇴 공연을 마치고 '자유인'이 됐다. 지난해 2월 기자회견을 열고 은퇴선언을 한지 1년 8개월만이다. 그동안 전국을 돌며 이어져온 은퇴공연의 마지막 무대. 이번 공연을 끝으로 더 이상 무대에 오른 '가수' 패티김을 만날수 없게 됐다.
가수로서 이룰수 있는 모든 것을 달성하고 마지막 순간을 맞은 패티김은 시원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왕의 퇴임을 바라보는 관객은 섭섭한 마음이 더욱 컸다. 장장 4시간에 달하는 마지막 공연에서 관객과 소통하는 패티김의 모습에서 흔들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카리스마를 발산할뿐, 은퇴하는 노가수의 여린 모습은 찾아볼수 없었다. 패티김이 "더 이상 목이 쉴까봐 또 살이 찔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김치·밥·아이스크림까지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며 마지막 인사를 하자, 그를 붙들고 싶어했던 관객도 힘겹게 뻗었던 손을 내려놨다. 26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패티김의 은퇴 공연 그랜드파이널 '굿바이 패티'를 함께했다.
▶완벽했기에, 더욱 아쉬웠던 공연
여왕의 폐위식은 웅장했다. 55년 공연 노하우가 집약됐고, 한치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히트곡을 빠짐없이 불렀고, '유 레이즈 미 업' 같은 팝송까지 들려줬다. 10년은 더 거뜬히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완벽했기에, 그녀를 떠나보내야 하는 팬의 입장에선 더욱 아쉬운 공연이 됐다.
그녀의 공연은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로 시작되는 '서울의 찬가'로 화려하게 문을 열었다. 이어 '서울의 모정' '람디담디담'으로 밝은 분위기를 이어갔다. 세 곡을 내리 부른 패티김은 숨을 고르며 "그동안 목이 쉴까, 살이 찔까, 무대 구성, 의상 선택 등에 따르는 압박감과 부담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제는 자유인이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렸다"며 무대를 내려오는 해방감을 전했다. 이어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생명의 꽃' '초우' '구월의 노래' '연인의 길' 등 히트곡 메들리가 시작됐다. 노래를 따라부르는 팬들의 목소리도 높아갔다. 체조경기장은 일순간에 거대 노래방이 됐다.
마지막 공연답게 2004년 '굿바이'로 가요계 데뷔한 둘째딸 카밀라도 잠시 무대에 올랐다. 패티김과 카밀라는 바바라 스트라이샌드 셀린 디온이 부른 듀엣곡 '텔 힘'을 열창했다. 그는 지난해 암 선고를 받은 여동생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항상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난해 친동생이 암 선고를 받았다. 지금은 기적적으로 회복해서 많이 좋아졌다. 지난해부터 올 가을까지 동생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며 '유 레이즈 미 업'을 선곡했다.
열정 가득한 모습으로 네시간여의 공연을 이끌었다. 그는 "나는 모래시계다. 내 나이를 거꾸로 뒤집으면 이제 57세 밖에 안 됐다. 아직 한창 나이다. 10대 K팝만 소리지르고 놀라는 법 없지 않냐. 우리도 마음껏 놀 수 있다. 보여주자"며 객석을 흔들었다.
소속사 관계자는 "이날 공연에는 25명의 오케스트라·50여명의 합창단·대북 퍼포먼스를 위한 대북주자 5명 등 무대 출연진만 해도 80여명이 넘는다"며 "항상 최고를 고집하는 패티김답게 완벽한 무대를 완성했다"고 말했다. 공연 마지막 곡으로는 '그대 내 친구여'를 불렀다. 노래를 마친 뒤 앙코르를 외치는 1만여 팬들의 성원에 주저 앉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후 '이별'의 반주가 흘러나왔고 후배 가수인 양희은·이선희·진미령·인순이·이은미 등이 무대에 올라 패티김에게 꽃다발을 안겼다. 패티김은 다시 한 번 마이크를 붙잡고 "감사합니다. 굿바이!"라는 인사를 하며 무대 뒤로 사라졌다. 55년 패티김 음악 인생은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패티김, 역사가 되다
패티김은 한국 가요 역사의 산 증인이다. 해방 후 1958년 데뷔해 만 55년 동안 대한민국 가요계를 쥐락펴락한 진정한 의미의 '퀸'이었다. 숙명의 라이벌 이미자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경쟁하며 수 많은 대기록을 썼다. 이미자가 자신의 노래에 '한의 정서'를 담았다면, 패티김은 시대를 관통한 트렌드를 입혔다. 이미자가 국민을 보살핀 여왕이라면, 패티김은 해외에 한국의 음악을 알린 호전적 지도자였다.
1962년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리사이틀 공연을 열었다. 1971년에는 처음으로 디너쇼를 열어 눈길을 끌었다. 이후 일본과 동남아시아, 미국에도 진출했다. 미국 NBC '자니 카슨-투나잇 쇼'에 출연하는 등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뻗어나갔다. 1978년 대중 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패티김 리사이틀-서울의 연가'를 공연했다. 1989년에는 한국인 가수로는 조용필에 이어 두 번째로 '꿈의 무대'라 불리는 미국 뉴욕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펼쳤다. 1996년 연예예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고 문화훈장(5등급)을 수여받는 등 하루하루 대중음악 기록을 써내려갔다.
패티김의 해외 활약은 국민의 열망과 사랑이 있어서 가능했다. 팬들은 언제나 그의 해외 활동 소식에 기뻐했고, 국내 무대에 복귀하면 따듯하게 반겼다. '가수' 패티김의 마지막 모습을 볼수 있었던 마지막 은퇴 공연에도 1만여명이나 되는 관객이 빼곡하게 객석을 가득 채웠다. 최정상급 아이돌만 공연할 수 있다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도, 패티김을 담아내기에는 그릇이 작아 보일 정도였다.
패티김은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게 세가지 있다. 건강·가족·사랑이다. 인생에 사랑이 없다고 생각하면 삭막하지 않냐. 그런 의미로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지난 55년 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래서 행복하고 진정한 축복이라고 믿고 있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눈물에 젖은 객석을 바라보며 "이제 나는 마지막 정거장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여러분은 눈물 흘리지 마라. 나는 더 힘들다"고 담담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