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 축구단은 27일 광양전용구장에서 열리는 전남 드래곤즈와의 K리그 클래식 39라운드를 마지막으로 25년 역사를 마감한다. 1989년 창단한 일화 축구단은 K리그 최다 우승(7회)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만, 쓸쓸히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난다. 성남시가 일화 축구단을 인수해 내년 1월부터 시민구단으로 재출범할 예정이다.
24일 성남의 한 식당에서 '성남 레전드' 신태용(43)과 이상윤(44), 박남열(43)을 만나 일화 축구단을 추억했다.
-90년대 창단 초창기에는 어땠나.
박남열(이하 박): 그땐 나, 신태용, 이상윤, 고정운, 사리체프, 안익수 등이 주축이었다. 포항, 대우에 한참 못 미치는 스쿼드였다.
신태용(이하 신): 91년까진 성적이 안 좋았다. 훈련 시설도 없었다. 언제 어디서 훈련장이 확보될지 모르니 숙소 5분 대기조였다. 후암초등학교 운동장 맨 땅에서 훈련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초창기 일화 하면 박종환 감독이 떠오른다.
신: 박 감독님 시절 전술은 그냥 맨투맨이었다. 4-4-2 포메이션 이런 건 없었다. 마크맨을 화장실까지 쫓아가고, 황선홍 형이 부상으로 라인 밖으로 나가도 주위를 맴돌 정도였다. 전반을 망치면 라커룸에 뛰어 들어가 물통부터 치웠다. 눈에 보이는걸 다 집어 던지셨다(웃음).
이상윤(이하 이): 그래도 일화 역대 최고 사령탑은 박종환 감독님이었다. 불가능할 거라 여겼던 우승을 연달아 해냈다. 호랑이도 무서워할 분이었지만 잔정이 많으셨다.
박: 83년 청소년대회 4강 신화를 쓴 박 감독님은 일화 초창기에 선수들 보다 인기가 많았다. 아저씨 부대가 동대문 구장을 찾아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응원했고, 후암동 숙소까지 찾아와 소리를 질러도 이웃들이 이해해줬다.
-90년대 중반은 암흑기였다.
신: 96년부터 4년간 8위-8위-꼴찌(10위)-꼴찌(10위)를 했다. 96년 심판 판정 항의로 보이콧을 한 뒤 내리막이었다. 97년부터 2년간 성남을 이끈 벨기에 출신 레네 감독은 그냥 한국에 관광 온 분 같은 느낌이었다.
박: 98년 천안 오룡경기장은 조명탑이 없어 낮경기를 해야 했다. 전남전 도중 일몰이 와서 승패를 동전 던지기로 가렸다. 장대일이 동전을 잘 던져 우리가 이겼다. 숙소엔 에어컨이 없었다. 에어컨이 빵빵한 인근 당구장 당구대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레알 성남'으로 거듭났다.
신: 2001년부터 돈 보따리를 풀었다. 샤샤와 김도훈, 이기형, 데니스, 싸빅 등을 대거 영입해 윤정환, 김대의가 벤치에 앉을 정도였다. 샤샤는 지금 데얀(서울)보다 잘하는 선수였다. 톱스타 여배우와도 스캔들이 났다. 당시 대표팀 히딩크 감독은 이상하게 성남 선수들은 거의 안 뽑았다. 난 2002년 K리그 MVP였는데, 주위에서 '전세계 축구를 통틀어 MVP를 받고도 대표팀에 뽑이지 않는 유일한 선수'라고 하더라. 대표 차출이 거의 없어 2001년부터 3연패를 달성한 것 같다(웃음).
-고 문선명 총재의 축구단 사랑이 대단했다.
신: 박규남 성남 단장이 'A, B 선수 영입을 위해 50억원이 필요합니다'라고 편지를 쓰면 그 자리에서 주셨다. 브라질에서 친선경기를 하는데 문 총재가 헬기를 타고 와서 작전 지시를 한 적도 있다. 문 총재가 실시간 축구 시청을 하기 위해 K리그 최초로 인터넷 생중계를 만들었다.
-일화 축구단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 일화 축구단은 '뿌리 없는 나무'였다. K리그 최다 우승팀이지만 지금까지 클럽하우스도 전용구장도 없다. 레전드에 대한 예우도 없다. 오늘 FC서울의 홈 경기를 중계했는데, 이영표의 영구결번 행사를 해주더라. 부러웠다. 난 2000년에 13골·6도움을 하고도 일방적인 방출 통보를 받았다. 일화 레전드들 중 누구도 일화 축구단을 살리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그만큼 일화 축구단에서 겪은 아쉬움과 서운함이 커서일지 모르겠다.
신: 나 역시 단 1분이라도 은퇴경기를 뛰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꽃다발 하나만 주겠다고 했다. 선수일 때 연봉 등 지원을 다해줬는데 은퇴까지 챙겨줄 이유가 없다는 투였다.
박: 나도 9년간 일화에서 뛰다가 2004년 첫 부상을 당했는데 나가라고 해서 너무 슬펐다. 명가 타이틀에 걸맞게 발전했을 줄 알고 코치로 다시 왔는데 환경이 크게 나아지진 않았다. 안타깝지만 '뿌리 없는 나무'라는 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