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구검은 사마씨의 권력독점에 대항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인물이다. *고평릉의 난 이후 사마씨에 대항해 왕릉의 난, 이풍의 난 등 반란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이 중 관구검의 난은 위나라를 송두리째 흔들 정도로 큰 반란이었다. ‘삼국지연의’는 관구검을 충의의 인물로 묘사하고 있지만 과연 그런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관구검은 성이 관구이고 이름이 검이다. 그의 부친 관구흥은 조비의 즉위 초 무위태수가 되어 옹주자사 장기와 함께 서량의 반란을 진압한 공신이다. 관구검은 공신의 아들답게 젊은 시절부터 매우 잘 나갔다. 부친의 작위를 세습했고 태자 조예의 막료가 됐다. 조예의 신임을 받은 그는 조예가 제위에 오르자마자 고속으로 출세했다. 관구검은 유주자사가 되어 요동을 공격했으나 공손연의 방어에 막혀 실패했다. 사마의가 요동정벌에 나섰을 때 조예는 그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위신을 만회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 후 관구검은 고구려를 정벌해 위명을 크게 떨칠 수 있었다.
관구검은 이 공으로 정남(征南)장군이 되어 예주의 여러 군대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게 됐다. 사마씨가 집권한 이후에도 관구검의 사정은 나쁘지 않았다. 관구검은 동흥의 싸움에서 무너진 위군을 구원한 공로로 패전 책임을 진 제갈탄과 자리를 바꾸어 정동장군이 됐다. 정동장군은 동오와 경계를 맞댄 양주를 책임졌으므로 비중이 높았다. 제갈탄은 자신의 임지를 빼앗기게 된 것을 두고두고 한스러워했다. 제갈각이 대대적인 북벌에 나섰을 때 관구검은 다시 합비 신성에서 동오군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잘 나가던 관구검에게 어둠이 드리워진 것은 이풍의 반란이 실패하고 조방이 폐위되면서부터였다. 관구검은 이풍의 난의 주모자인 이풍·하후현과는 절친한 관계였다. 관구검은 잔혹한 사마사가 자신을 이풍의 일파로 의심할까 두려웠다. 가뜩이나 외방에서 강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그를 사마사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참이었다.
관구검은 조상의 일파로 비슷한 처지였던 양주자사 문흠과 손잡고 임지인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관구검과 문흠은 대병을 이끌고 중원의 한복판인 예주 여남군 항성까지 진격했다. 사마사와 일전을 겨뤄 일거에 패권의 향방을 결정지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사마사는 이에 말려들지 않고 지구전을 펼쳤다. 대치상태가 길어지자 대부분 북방에 가족을 두고 있던 관구검과 문흠의 병사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악가의 싸움에서 문흠이 패하자 관구검의 군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와해됐다. 관구검은 항성을 버리고 몇 사람의 측근만을 데리고 신현으로 달아났다가 강가에 이르러 일개 촌부에게 살해됐다.
결국 관구검의 반란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마씨의 권력만 더욱 공고하게 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이로써 위나라의 멸망아 재촉됐다. 이를 보면 관구검의 반란이 위나라 조정에 대한 충의보다는 사적인 이해관계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마씨가 집권하게 된 계기는 조예의 방탕과 조방의 무능으로 위나라가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위나라가 중심을 잃자 국내의 여러 세력들은 치열한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갔고 사마씨나 왕릉·이풍·관구검도 이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결국 사마씨가 가장 유능했기에 최후의 승자가 됐고, 정권을 계승하게 된 것이다.
[영웅의 이면] 관구검·제갈탄·곽회 세 사령관의 행보
삼정은 위나라의 국경 방위를 책임지는 정동장군·정남장군·정서장군을 지칭하는 말이다. 삼정은 각각 동오의 양주방면, 동오의 형주방면, 서촉의 옹량주방면의 방위를 책임졌다. 이들은 국경을 방위하는 최전선의 병력들을 모두 지휘하고 있었으므로 매우 군사력이 강했다. 삼정이 힘을 합쳤더라면 중앙의 사마씨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 힘을 합치지 못했다.
관구검(?~A.D 255년)의 난 당시 삼정은 정동장군 관구검, 정남장군 제갈탄, 정서장군 곽회였다. 관구검은 문흠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갈탄과 곽회에게 함께 호응할 것을 촉구했다. 이 중 곽회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난이 진압될 때까지도 서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문제는 제갈탄이었다. 제갈탄이 관구검에 호응했더라면 위나라의 정세는 어떻게 돌아갈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제갈탄은 관구검이 보낸 사자의 목을 베고 관구검의 난을 진압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저 자신도 불과 2년 후에 사마씨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었으면서도 말이다. 결국 관구검과 제갈탄은 각개격파되고 말았다.
제갈탄이 관구검에게 협력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개인감정 때문이었다. 제갈탄과 관구검은 비슷한 연배였지만 서로 정파가 달랐다. 관구검은 조예의 측근으로 승승장구했지만, 제갈탄은 조예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그가 젊은 시절 하후현·이풍·등양 등과 함께 집단을 이루어 명성을 날렸는데 조예가 이들의 행태를 몹시 못마땅해 했기 때문이었다.
제갈탄에게는 사마사에게 반대해 관구검의 편에 설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사마사의 의심과 경계를 받았던 것은 관구검만이 아니었다. 제갈탄 역시 외방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중앙에 그대로 남아있었더라면 무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제갈탄은 사마씨에 의해 주멸된 조상의 일파와도 매우 가까운 관계였고, 이풍의 음모에 연좌되어 주살된 하후현과도 절친했다.
제갈탄이 좀더 현명했었더라면 감정을 떨쳐버리고 관구검 지원에 나섰어야 한다. 그는 어리석게도 이해관계를 버리고 개인감정에 매달림으로써 제 묘혈을 파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사람들이 제갈탄을 집안 형뻘인 제갈량, 제갈근에 빗대어 말하길 ‘서촉은 용을, 동오는 호랑이를 가졌으나 위나라는 개를 가졌다’ 한 까닭이다.
제갈탄의 어리석은 행보는 옹골찬 대응으로 천수를 다한 정서장군 곽회와 무척이나 대조된다. 곽회의 부인은 왕릉의 누이동생이었다. 왕릉의 반란 모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사마의가 곽회에게 그의 부인을 붙잡아 보내라고 명했다. 곽회는 심사숙고한 끝에 부인을 보내지 않기로 결심하고 사마의에게는 편지를 보내 계속 강요하면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했다.
“어미가 없었으면 다섯 아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섯 아들이 없으면 곽회도 역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깜짝 놀란 것은 사마의였다. 곽회가 반란을 일으켜 촉과 연합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아무리 모진 사마의였지만 그깟 부녀자 하나 때문에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었다. 그는 특별히 조서를 써 곽회와 그의 부인을 사면했다. 곽회는 4년 후 천수를 다하고 죽었는데, 그때까지 사마씨 부자는 그에게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거짓말 벗겨보기] 관구검이 한나라를 지키려 했다고?
관구검과 제갈탄에 대한 ‘삼국지연의’의 기술은 그들이 마치 나라를 찬탈하려는 역적의 무리에 대항해 의롭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것을 무척 아쉬워하는 논조이다. 이들이 지키려했던 왕조가 정통인 한나라의 역적인 조씨가 세운 위나라였는데도 말이다. 이는 촉한정통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실 ‘연의’가 옹호하려는 것은 유교적 정통론일 뿐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어떠한 왕조라 할지라도 그 왕조를 지키려는 자는 충신이고, 그 왕조를 무너뜨리려는 자는 역적이 된다. ‘삼국지연의’는 무조건 기존의 왕조에 충성해야 한다고 백성들을 세뇌시키기 위해 쓴 정치 교화서이다.
풀이
*고평릉의 난=사마의가 24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있던 조상과 그 일당을 처형한 사건. 이로써 위나라의 권력은 조씨에게서 사마씨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