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민(30·두산)은 2007년 2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차지했다. 이듬해 베이징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금메달까지 목에 걸었다. 우승을 확정짓는 마지막 더블 플레이 수비에서 유격수 박진만으로부터 공을 받아 1루수 이승엽에게 공을 뿌린 이가 고영민이었다. ‘화수분’으로 불리는 두산의 두터운 내야진에서도 2루는 늘 고영민의 차지였다.
‘잘 나가던’ 그에게 하락세가 찾아온 건 2009년이었다. 부상과 부진이 겹쳤고, 고영민이 없으면 어색했던 두산의 2루 자리는 어느덧 오재원·허경민 등 후배의 몫이 됐다. 결국 2013년엔 프로 데뷔 후 최소인 10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쳤고, 두산이 포스트시즌에서 기적을 이뤄내는 동안 고영민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몸보다 마음이 아팠다는 지난 시즌, 고영민의 심정과 2014년 시즌에 대한 각오를 들어봤다.
-현재 몸 상태는 어떤가.
"많은 사람들이 내게 하는 첫 마디가 ‘몸은 괜찮냐’이다. 몸 상태는 최상이다."
-사람들은 허리 부상으로 고생하는 줄 알고 있다.
"그런 추측이나 소문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해명한 적이 없어 그렇다. 솔직히 야구선수 중에 100% 건강한 상태로 뛰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잔부상을 달고 사는 게 선수다. 나 역시 그 정도였다. 언론이나 팬들이 말하는 ‘유리몸’이나 ‘고질적인 허리 부상’은 아니다. 오히려 2013년엔 몸 상태가 매우 좋았다."
-몸 상태가 좋았는데 부진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 솔직히 억울했다. 올 시즌 첫 10경기 동안 내 상태가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총 4안타를 쳤는데, 그 중 4월9일 KIA전 홈런이 기억난다. 단 한 개의 홈런이지만 맞는 순간 ‘타격이 바로 이런 거구나’ 싶었다. 스스로 타격이 업그레이드됐다는 느낌까지 받았는데 (경기에 나갈 수 없어) 답답했다."
-그런데 왜 2군에 내려가게 됐을까.
"시즌 초 사우나에 갔다가 옆구리에 담에 걸렸다. 부상이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혹시나 담이 커질까 봐 선발 라인업 제외를 요청했는데, 그후론 대주자나 대수비로 기용되다가 (4월26일 NC전을 끝으로)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1군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잠시 외야수 전향도 시도했었는데.
"내 의지는 아니었다. 코칭스태프의 권유가 있었다. 솔직히 ‘굳이 왜 나를’이라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내 자리는 2루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겠다'고 말씀드렸고, 중견수로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2군에서 외야수가 1군으로 올라왔고, 내가 내려갔다."
-2군에서는 어땠나.
"거의 기본 2안타, 3안타를 쳤다(23경기 타율 0.391). 몸 상태도 좋았다. 그런데 1군으로 불리지 못했고. 못 올라가니까 답답하고 초조했다. 나는 언제나 1군에서 뛰던 선수였다. 잠시 2군에 내려가더라도 열흘쯤이면 1군으로 다시 합류하곤 했다. 그런데 2군 기간이 길어지니 너무 괴로웠다. 나중에는 ‘이제는 불러도 안 올라간다’라는 반항심마저 생긴 게 사실이다."
-마음을 다잡은 계기가 있다면.
"시기적으로 결혼(2011년 12월) 직후부터 야구가 잘 안되다 보니, 아내가 ‘나 때문인가’하는 자책감을 갖더라. (그런 모습을 보며)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남을 탓하기보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야구를 진지하게 공부하다 보니 야구가 쉽게 느껴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SNS 문구에 '절.치.부.심'이라고 써놨던데
"4살 된 아들이 TV를 보다가 나와 닮은 개그맨 양상국을 보며 ‘아빠’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던 아들이 “야.구.장.”이라고 하더라.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빠가 야구 선수로서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절치부심이라고 써뒀다."
-2014년 목표는.
"순간의 집중력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게 야구다. 타석에 서서 장갑이 조금 거슬리기만 해도 안타가 될 타구가 파울이 된다. 순간에 혼을 담아야 하고,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마음이 여렸던 나는 제대로 된 기량을 보여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마음과 몸이 건강하다. 내 등번호가 14번이다. 2014년은 나의 해로 만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