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흐르면 축구도 변한다. 골잡이의 위치도 매번 달라졌다. 전방에 머물며 득점만 노리던 공격수는 사라지고 있다. 이제 수비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공격수가 각광 받는 시대가 왔다. 이 때문에 가운데 위치한 공격수보다 압박이 상대적으로 적은 측면에 위치하는 윙어의 가치가 올라가는 추세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꿋꿋하게 골잡이를 배출하는 팀이 있다. 바로 ‘골잡이 양성소’ 아틀렌티코(AT) 마드리드다. ‘알레티’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AT 마드리드는 1903년 창단됐다. 레알 마드리드가 중산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왕’이 창단한 구단이라면, AT 마드리드는 노동자 계급이 이에 대항해 만든 구단이다. 전통적 유니폼의 색상인 흰색-빨강색은 당시 가장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매트리스 천이었다고 한다.
창단 지지기반과 유니폼 기원에서 볼 수 있듯 AT마드리드는 상대적 약자였다. 축구에서도 생존을 위한 자신들 만의 ‘색깔’을 찾아갔다. 바로 뛰어난 골잡이를 보유하는 것.
AT 마드리드는 1939년 입단한 파코 프란시스코 캄포스를 시작으로 50년대 아드리안 에스쿠데로, 60년대 루이스 아라고네스, 70년대 루벤 카노, 80년대 마리오 카브레라, 90년대 마놀로, 2000년대 페르난도 토레스 등 리그 정상급 CF들을 꾸준히 발굴해 왔다.
2010년 대에는 라다멜 팔카오와 디에고 코스타 등 센터포워드을 발굴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AT 마드리드의 역사상 첫 전성기를 이끈 골잡이는 모두 측면 공격수였다는 것이다.
위대한 공격수 계보의 시작 '파코' 캄포스
파코 캄포스의 본명은 프란치스코 캄포스 살라망카다. 그는 1916년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태어났다. 에스테야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16세이던 1932년 스포르팅 산 호세와 계약하며 프로에 진출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마리노 라스팔마스에 입단했다. 18살이던 캄포스는 첫 시즌 팀을 정상으로 이끌며 주목 받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고 그도 축구공 대신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갔다.
1939년 전쟁이 끝난 뒤 그는 AT 마드리드에 입단했다. 1939년부터 1947년까지 AT 마드리드는 팀 이름을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으로 바꿨다. 입단 첫해 캄포스는 극적인 역전 우승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12개 팀이 라 리가에 참가했는데 AT 마드리드는 한 때 8위까지 추락했다. 그러나 1940년 2월 중순부터 반등에 성공했다. 그러나 세비야의 후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세비야는 21라운드에서 바르셀로나를 2-1로 잡으며 셀타 비고에 0-1로 패한 AT 마드리드를 2위로 끌어내렸다.
운명의 최종 22라운드. AT 마드리드는 발렌시아를 만났다. 오른쪽 공격수로 나온 캄포스는 전반 7분 만에 선제골을 뽑아내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세비야는 최종전에서 에르쿨레스와 3-3으로 비기며 정상의 문턱에서 좌절했다. AT 마드리드의 역사상 첫 정규리그 우승이었다. 8골을 넣은 캄포스는 영웅이 됐다.
1940-41시즌에 그는 왼쪽 날개로 자리를 바꿨고, 16골을 넣으며 팀의 2연패를 이끌었다. 캄포스는 1948년 팀을 떠나기 전까지 정규리그에서 120골(235경기)을 넣었다. 컵 대회를 포함하면 총 144골을 기록했고, 이는 AT 마드리드 역대 3위다.
펠레가 극찬한 흑진주
“내가 축구황제라면 벤 바레크는 축구의 신이다.”
브라질의 축구황제 펠레가 한 말이다. ‘흑진주(Black Pearl)’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벤 바레크 역시 AT 마드리드의 역사를 새로 쓴 골잡이다. 그의 포지션은 2선 공격수였다. 당시까지는 미드필더와 공격수의 포지션구별이 정확하지 않았다.
그는 측면에 배치돼 경기를 조율하다가 갑자기 최전방까지 쓰윽 올라가 골을 곧잘 넣었다.
1938년, 21살의 나이로 프랑스 마르세유로 이적한 벤 바레크는 유럽에서 성공한 첫 번째 흑인 선수로 기록돼 있다. 마르세유 입단 첫해 뛰어난 기량을 보인 그는 프랑스로 귀화해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다.
벤 바레크가 AT 마드리드에 입단한 것은 1948년이다. 31살로 전성기가 지났지만 캄포스의 빈자리를 완벽히 메우며 AT 마드리드의 전성기를 다시 열었다. 벤 바레크는 AT 마드리드 전설 중 한 명인 아드리안 에스쿠데로와 궁합이 잘 맞았다. 바레크가 패스를 넣어주면 CF 에스쿠데로가 마무리 하는 식이었다.
벤 바레크는 1949-1950시즌에 11골, 1950-1951시즌에 14골을 넣었다. 아르헨티나 출신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이 이끌던 AT 마드리드는 라 리가 2연패를 달성했다. 에스쿠데로도 1950-1951시즌에 19골을 넣는 등 AT마드리드에서 통산 169골을 기록해 역대 2위에 올라 있다.
40~50년대 첫 전성기를 보낸 AT 마드리드는 10년 넘게 라 리가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코파델레이와 유럽대항전에서는 나름 성과를 냈지만, 라 리가에서는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에 밀려 60년대 중반까지 기를 펴지 못했다.
그러나 1963년 ‘미들라이커’ 루이스 아라고네스가 입단하며 AT 마드리드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1952년부터 AT 마드리드에서만 뛰었던 첫 번째 ‘엘니뇨(El Nino)’ 엔리케 코야르도 데뷔 13년 만에 첫 정규리그 우승의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소년'과 '왕발'의 만남
코야르는 어린 나이부터 주목을 받았다. AT 마드리드 유스팀을 거친 그는 18세 때 프로 계약을 한다. 스페인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맹활약하며 1952년 UEFA(유럽축구연맹) 18세 이하 챔피언십 우승을 이끌었다. 이때 그는 ‘엘니뇨’란 애칭을 처음으로 얻었다.
AT 마드리드 팬들은 ‘노장’ 에스쿠데로와 ‘신성’ 코야르의 조합에 많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AT 마드리드의 리그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코파 델 레이(국왕컵)와 컵위너스컵에서 정상에 오르며 그나마 체면치레를 했다.
그러나 1963면 레알 베티스에서 사파토네스(Zapatones)란 별명의 아라고네스가 영입되면서 30살이 넘어간 ‘소년’ 코야르도 라 리가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사파토네스는 큰 신발이란 뜻으로 ‘왕발’ 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워낙 킥이 좋아 붙은 별명이다. 아라고네스는 프리킥이 날카로웠고, 1960년에는 골킥을 바로 골로 연결하는 괴력을 보이기도 했다.
아라고네스와 코야르가 함께 뛴 1965-1966시즌 AT 마드리드는 레알 마드리드를 승점 1점 차로 따돌리고 라 리가 정상에 올랐다. 1969년 코야르는 발렌시아로 떠났지만, 아라고네스는 홀로 남아 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1969-1970시즌 다시 AT 마드리드를 정상에 올려놨다. 당시 30경기에 출전해 16골을 넣은 그는 미드필더로는 드물게 피치치(득점왕)의 영광도 차지했다. 그는 라 리가 우승컵 3개와 코파 델 레이 우승컵 2개, 인터콘티넨탈컵 1개를 안기고 1975년 은퇴해 감독으로 변신했다.
'현자'가 키운 21세기 '소년'
‘왕발’ 아라고네스는 은퇴 후 감독이 돼서는 ‘현자’로 애칭이 바뀌었다. 2001년 다시 세군다리가(2부 리그)에 머물던 AT 마드리드로 돌아온 ‘현자’는 또 한 명의 ‘엘니뇨’를 키워낸다. 예상한 팬들도 있겠지만 페르난도 토레스가 그 주인공이다.
토레스는 원조 ‘엘니뇨’ 코야르처럼 AT 마드리드 유스팀에서 자랐다. 그리고 16살 때 성인계약을 맺고 경기장에 나섰다. 토레스는 데뷔 첫해 세군다리그에서 6경기에 나와 1골을 넣으며 미완의 대기로 남아있었다. 그러다 2001년 아라고네스 감독이 부임하며 전격 주전으로 발탁됐다. 17세의 어린 선수였지만 그는 정규리그 36경기에 나와 6골을 넣으며 팀의 라 리가(1부 리그) 승격을 이끌었다.
그리고 2002-2003시즌에는 18살에 13골(29경기)을 몰아넣으며 스페인의 차세대 공격수로 기대감을 높였다. 토레스는 유로 2008 당시 아라고네스 감독과 함께 스페인을 44년 만에 유럽 정상에 올려놓으며 영웅으로 떠올랐다.
아틀레티코 정통 공격수 고집
AT 마드리드는 1997-1998시즌부터 정통파 중앙 공격수를 보유하려고 애를 썼다. 시작이 크리스티안 비에리(이탈리아)였다. 그리고 1999-2000시즌에는 네덜란드의 제이미 하셀바잉크를 영입했지만 팀이 강등되며 주축을 잃게 됐다. 이후 토레스가 자라며 어느 정도 자리를 채웠다.
그러면서도 공격수에 대한 욕심은 계속 됐다. 2006년 아르헨티나의 신성 세르히오 아구에로를 영입했고, 2007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에서 실패한 디에고 포를란을 데려왔다. AT 마드리드는 두 선수를 잘 써먹고 비싼 값에 팔았다.
두 선수를 판 뒤에는 라다멜 팔카오로 재미를 봤고, 올해는 디에고 코스타가 등장하며 AT 마드리드의 공격수 계보를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