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감독은 19살 때 은퇴한 무명 축구선수다. 중앙 수비수의 키는 172cm도 안 된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조합이다.
편견을 깬 칠레에서는 가능했다. 이들이 뭉친 칠레는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피치에서 엄청난 열정을 뿜어냈다. 칠레는 29일(한국시간) 벨루오리존치의 미네이랑 경기장에서 열린 2014년 월드컵 16강에서 개최국 브라질을 만나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결국 2-3으로 패해 탈락했다. 브라질 팬에게도 박수를 받을 정도로 뜨거운 경기였다.
경기 전날 호르헤 삼파올리 감독의 공식 기자회견에 들어갔다. 작은 키에 머리를 빡빡 민 삼파올리 감독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다음날 개최국 브라질을 상대하는 감독이 맞는지 싶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마라카냥의 비극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여줬다. 64년 전 우루과이도 했던 일이다. 우리라고 못할 것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전술 철학도 뚜렷했다. 그는 "공을 점유하는 것보다 공간을 파고드는 축구를 할 것이다"고 밝혔다. 어떤 선수가 나오는지, 못 나오는지 물어보면 가감 없이 말했다. 16강을 앞두고 전술을 숨기거나, 미리 패배에 변명거리를 찾는 말 따위는 없었다. 정말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아 놀랐다.
누가 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브라질은 개최국에 백전 노장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66)감독이 이끌고 있고, 네이마르(22·바르셀로나)라는 걸출한 스타도 있다. 반면 칠레는 알렉시스 산체스(27·바르셀로나)와 아르투로 비달(27·유벤투스)가 있긴 하지만 이름 값에서는 브라질에 밀린다. 이를 접전으로 끌고 간 것도 대단하다고 박수가 나왔다. 그런데 패한 뒤 삼파올리 감독의 표정은 더 놀라웠다. 패한 칠레 기자들도 "축하한다"고 했지만, 삼파울리 감독의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눈이 풀려 허공을 쳐다보던 그는 "정신 승리는 의미 없다. 브라질을 상대로 잘했지만 패한 것은 패한 것이다"며 "새로운 역사를 쓰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삼파올리. 유럽축구에 익숙한 한국에서는 전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감독이다. 자료를 보니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19세에 축구를 그만뒀다. 정강이뼈 부상으로 뉴웰스올드보이스의 유망주였던 그는 일찌감치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젊었던 그는 아르헨티나의 한 아마추어 팀에서 감독생활을 시작했고, 페루를 거쳐 칠레로 왔다. 밑바닥에서 한 나라의 축구 대표팀을 맡기까지 이 승리에 대한 열정 하나로 올라온 것이다. 칠레 축구협회는 2012년 그를 선임했는데 편견이 없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삼파올리 감독의 페르소나는 가리 메델(27·카디프 시티)이다. 메델의 키는 삼파올리 감독과 똑같은 172cm. 현역시절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삼파올리 감독은 그를 중앙 수비수로 내렸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우승으로 이끈 파비오 칸나바로(41·은퇴)보다 4cm나 작다. 키가 작은 선수는 중앙수비수를 볼 수 없다는 인식이 강한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 대회 돌풍의 중심인 공격적 스리백(3-Back)의 중심엔 메델이 있었다. 브라질의 장신 공격수 프레드(31·플루미넨세)와 몸싸움도 밀리지 않았다. 프레드의 키는 185cm였지만, 메델의 영리한 수비에 고전하다 조(27·미네이루)와 교체돼 나갔다. 공격으로 전환할 때는 미드필더답게 공을 앞으로 보내는 빌드업(Build up)도 뛰어났다. 편견을 깬 삼파올리의 기용이 브라질을 끝까지 괴롭힌 것이다.
2014 브라질에서 칠레의 도전은 끝났다. 그러나 삼파올리 감독은 "우리의 축구는 끝나지 않았다. 내년에 칠레에서 열리는 코파아메리카에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했다. 칠레의 축구는 삼파올리의 말처럼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