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해준 감독은 충무로에서 다작을 한 감독에 분류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연출을 맡은 건 '천하장사 마돈나'(06), '김씨 표류기'(09) 뿐이다. '끝까지 간다'(13)와 '아라한 장풍 대작전'(04), '품행제로'(02) 등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각본과 각색이었다. 그랬던 그가 야심차게 준비한 세 번째 작품이 오는 30일 개봉을 앞둔 '나의 독재자'다.
'나의 독재자'는 첫 남북 정상 회담을 앞둔 1970년대, 회담의 리허설을 위한 독재자 김일성의 대역으로 선택된 무명 연극배우와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설경구가 김일성의 대역을 맡은 배우 성근, 박해일은 설경구의 아들 태식 역을 맡았다. 이해준 감독은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두 배우가 아버지와 아들로 보일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고 운을 뗐다.
-설경구와 박해일 중 누가 먼저 캐스팅됐나.
"박해일이 먼저 됐다. 3년 전에 서교동 김치찌개 집을 새벽 3시쯤 촬영감독과 함께 갔는데 비현실적으로 거기에 박해일이 있더라. 합석이 됐고, 해가 뜰 때까지 함께 술을 먹었다. 그러던 중 (차기작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가 될 거라고 말했고, 박해일이 '내가 그럼 아버지 해야 해?'라고 묻더라. 해준다면 고맙지만 (당시에는) 술이 깨면 다 잊어버릴 거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웃음)"
-다시 만난 건가.
"(서교동에서 만나고) 1년 후인가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때 새벽 1시쯤 (박해일로부터) 전화가 왔고, 호프집에서 만나 '시나리오가 언제 나오느냐'고 묻더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이 없으면서도 생각이 단단한 친구다. (영화 촬영 동안)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항상 별 말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줬다."
-설경구와 박해일의 부자연기에 대해 고민은 없었나. 나이 차이가 불과 9살인데.
"설경구가 작품을 함께 해준다면 넙죽 절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모든 감독이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배우다. 하지만 고민이 되기도 했다. 9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두 배우가 과연 아버지와 아들로 보일 것이냐가 중요했다. 그래서 특수분장에 더 신경을 썼다. 시나리오가 나오고 가장 먼저 보여준 사람이 송종희 분장감독이다. 그 분을 섭외하지 않고서는 만들어지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흔쾌히 참여해 주셔서 감사하다."
-극 중 성근이 연기하는 연극이 '리어왕'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일단 70년대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연극으로 많이 했다. 거기에 '리어왕'의 대사가 중요했다. 그가 내뱉는 대사가 성근의 삶을 단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김일성을 묘사하는데 부담은 없었나.
"걱정이 되거나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것과 무관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김일성이 아니라 무명배우에게 지상최대의 과제, 최고의 악역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당시 최고의 악역이 누구일까를 생각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일성을 그려냈다."
-연기에 특별한 디렉팅이 있었다면.
"영상을 보면서 같이 연구를 많이 했는데 (김일성이) 손을 과장되게 많이 쓰더라. 설경구라는 배우가 이 배역을 하겠다고 말하는 자리에서 손을 잡으면서 '아이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는데, 손이 크고 두껍더라. 그 순간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 이거 됐다'라는 생각과 함께 고민이 손에서부터 풀리더라."
-이야기를 들어보면 손이 굉장히 중요했다.
"손이 얼굴과 같이 잡히면 그럴싸하게 보이는 게 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 설경구의) 손이 분장된 거라고 생각하는데 검버섯 같은 거만 심었고 특별한 분장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2.35:1 비율로 찍었는데, 후반에는 1.85:1로 바꿨다. 그게 훨씬 손을 더 잘 보이게 하는 비율이다.(웃음)"
-내용 자체가 원래 관심이 있던 사안인가.
"기사를 보면서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관련 내용 중 토막 기사 하나를 봤었다.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기 전에 철저한 리허설을 치르고 갔다는 내용이었다. 국정원 소속의 대역배우와 A·B안을 갖고 철저한 리허설을 하고 왔다는 현실 같지만 비현실적인…그래서 관심이 갔다."
-마지막 정상회담 리허설 장면이 압권인데.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이거 하나만 보고 달려왔다고 할 정도로 중요했다. 배우는 물론 나조차도 초긴장상태에서 촬영을 했다. 여섯 번의 테이크로 갔는데, 세 번째 테이크를 봤을 때는 난감한 부분이 있었다."
-어떤 부분이 그랬나.
"경구형도 감정이 정확하게 뭐지? 그러는 상태였다. 나 또한 정확히 어떤 느낌일까 잡히지 않더라. 속으로 망했다고 생각했다.(웃음) 그러던 찰나에 경구형이 '옛날 생각하면 돼?'라고 말했고, 나도 "그렇게 하면 될 거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4·5·6번의 테이크에서 미친 연기가 나왔다. 저 사람은 감정 하나만 가지고도 저렇게 연기를 하는구나 싶더라. 놀라웠다."
-결과를 평가하자면 어떤가.
"성근이 원하던 연기를 한 거 같다.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소박한 무대에서의 연기, 그것을 결국했으니까…물론 치러야하는 대가도 있었기 때문에 씁쓸하기도 했다."
-실제 아버지는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
"독재자 같은 면이 있으신 분이다. 화도 많으시고…지금은 몸이 아프셔서 거동도 하기 힘드신데, 내가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병준의 감초연기가 압도적이었는데.
"배우는 물론 인간적으로도 반했다. 굉장히 따뜻하신 분이다. 원래 팬이었는데, 팬심으로 캐스팅했다. 어떤 예술적 허세가 있는 인물, 이병준이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하드웨어가 좋았다.(웃음)"
-홍일점 류혜영의 존재감도 인상적이었다.
"류혜영은 불리한 조건에서 작업을 했다. 일단 분량이 적고, (초반에 안 나오다가) 뒤늦게 나온다. 낯선 신인배우가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두 큰 배우(설경구·박해일) 사이에서 자기 것을 지켜냈다. 연기 에너지가 큰 배우다."
-'나의 독재자'라는 제목은 처음부터 생각한 건가.
"다른 건 없었다. 이야기를 생각한다면 수사가 많이 담긴 제목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독재자라는 단어를 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제목 때문인지 딱딱하게 보시거나 정치적으로 오해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난 1년 중에 주변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는 달을 꼽으라면 11월이다. 제일 가깝지만 가까워서 소홀할 수 있는 가족들, 아버지가 살아왔던 생을 좀 더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