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문정희(38)만큼 '변신'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배우가 또 있을까. 문정희는 '연가시'(12)에서 자식을 구하려는 억척스러운 어머니 경순, '숨바꼭질'(13)에선 가난에 찌들어 살고 있으면서 집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주희 역을 맛깔스럽게 소화했다. 이 과정에서 33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을 품에 안았다. 망가짐을 두려워하진 않는 결과였다.
이번에는 비정규직 마트 직원이다. 문정희는 다음달 13일 개봉하는 영화 '카트'에서 비정규직으로 마트에서 일하다 해고 통지를 받은 후 투쟁하는 혜미 역을 맡았다. '카트'는 대부분 여성으로 이뤄진 대형마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룬 작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 후 많은 관심을 모았다. 문정희를 비롯해 염정아·김영애·김강우 등 베테랑 연기자들과 도경수(엑소 디오)·천우희·지우 등 개성 강한 충무로 유망주들이 하모니를 이룬다. 문정희는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는 세대별로 공감할 수 있는 코드가 있다"며 이야기를 풀어놨다.
-소재가 다소 파격적인데, 선택을 한 이유가 있나.
"고발영화는 아니고 공감이 될 만한 영화로 메시지가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발영화라고 했으면 조금 고민을 했을 것이다. 시나리오를 봤을 때 마트 직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2014년을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공감하는) 공통분모가 있을 거 같았다."
-게런티를 낮추면서 출연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상업영화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조건이 있는 건 아니지만 펀딩을 해서 투자를 모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제작사인) 명필름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성공보다는 (이런 소재를 영화로) 만드는 것 자체가 의미 있었다. 문화가 사회를 이끌고 가는 선봉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생각할 부분이 많은 영화다.
"20대는 천우희가 연기한 미진의 88만원 세대처럼 세대별로 공감할 수 있는 코드가 있다. 많은 분들이 이 부분을 봐주셨으면 한다. 그래서 이번 영화 홍보는 캐릭터보다는 공감적인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 중이다. 성공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시도 자체가 특이하기 때문에 영화계에서도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에서도 건드리지 못하는 문제 아닌가. 공감을 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런 부분에서 10대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그룹 엑소 멤버 도경수(디오)가 출연한 게 좋은 효과가 있을 거 같은데.
"그렇게 역이용 되는 건 좋다. 어떤 행보을 보여주고 어떤 영화에 출연했다는 건 그들(팬들에게)에게 문제를 함께 해보자는 뜻으로 전달될 수 있다."
-도경수의 연기는 어땠나.
"의미있는 작업을 함께 한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게 담백하게 연기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런 면에서 달리 보게 되더라. 좋은 에너지와 가능성을 가진, 내 마음 속의 스타다.(웃음) 생각도 바르고 극중 상황에나 역할이 잘 어울렸다."
-함께 촬영분이 많았던 천우희에 대한 관심도 높다.
"생각이 절대 어리지 않았다. 연기에 대해 우희랑 이야기를 많이 했다. 같은 배우끼리 그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쉽지 않은데, 둘 다 술을 마시지 못하지만 맥주 한 캔을 한 방에서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후배이긴 하지만 다른 제너레이션(세대)이라는 느낌이 들더라. 경수나 우희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 보이니까 좋았다."
-비정규직 문제에 원래 관심이 있었나.
"늘 있는 이야기 아닌가. (실제) 동생도 비정규직이었고, 정규직으로 가는 과정이 꽤나 험난했다. 우리 영화는 사회구조의 단면을 보여준다. 내 시작도 연극이었고, 어떻게 보면 나도 비정규직이었다."
-마트가 진짜처럼 실감나더라.
"화성 근처 폐공장을 세트로 만들어서 촬영을 했다. 야외는 크로마키판으로 도심 느낌이 나게 넣었다. 촬영일 만큼의 날짜를 빌릴 수 없어서 안에는 실제 마트와 동일할 정도로 제작했다. 차갑고 그런 분위기를 내기 위해 전체적인 느낌으로 파란색을 많이 사용했다."
-제작사 대표와 감독, 주요 배우들까지 모두 여자다.
"기싸움이 없었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지만 우린 모인 이유가 분명했다. 그럴 만한 짠밥도 아니었다.(웃음)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감사하고 잘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다. 40명이 넘는 분들이 함께 촬영했는데, 합숙을 해서 특별한 디렉션이 없어도 유대관계가 잘 맞았다. 불편하다면 날씨가 그랬다. 너무 추워서 기본으로 3~4겹은 껴입었다. 팔에 랩핑을 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김강우가 불편했겠다.
"아예 늘 배회하더라. 안에 히터가 있는데 보온병에 물을 싸서 다녔다. 큰 방 2개에 각각 20명씩 40명이 들어가 있었는데, 누가 (여자만 있는 곳에 들어오는 걸) 좋아하겠나.(웃음)"
-부지영 감독과의 호흡은 어땠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시는 디테일이 좋았다. 연기에 대한 디렉션이 강한 건 아닌데, 단체신이 많다보니까, 각자의 그림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디테일하게 잘 잡아주셨다. 여기에 카메라워킹이 화려하시다. 꼭 할리우드 같았다. 그런 카메라워크에 맞춰야 하니까 실제처럼 맞추기 위해 리허설을 많이 했다."
-기존 이미지를 버린 염정아의 모습도 인상적이더라.
"정아 선배님하면 럭셔리하고, 미스코리아 출신이기 때문에 배우가 갖추고 있는 아름다움이랄까. 난 못 사는 층 연기를 많이 해서 (망가지는 것에 대한) 그런 부담감이 없었다. 어떻게 나와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정아 언니는 고급스러운 로열패밀리 같은 느낌이 있어서 그걸 버리실까 생각을 했는데, 연기와 역할에 욕심이 많은 배우더라. 진짜 그 캐릭터처럼 보이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하셨다."
-어떤 노력을 말하나.
"키가 크다보니까 (연기를 할 때) 약간 구부정하게 하셨다. 키가 큰 아줌마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세상 물정 몰랐던 선희가 조합원에 함께 섞이는 캐릭터로는 좋았다. 실제 워낙 털털하시고, 인품이 좋으신 분이다. 늘 후배들에게 내리사랑이시다. 난 복이 많은 거 같다."
-마지막에 물대포를 맞으면서 돌진하는 장면이 압권이었는데.
"물을 약하게 할 수 없었다. 고속촬영을 해서 눈을 감을 수 없으니까 뜨고 카트를 밀어야 했다.(웃음)"
-촬영 후 마트를 갈 때 마음가짐이 다를 거 같은데.
"시나리오를 받은 후부터 태도가 달라졌다. 벤치마킹을 해야 하니까 실제 마트에 가서 유심히 보기도 했다. 요즘에는 (계산대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레이저로 물품을 찍더라. 소비자 입장에서는 느리면 싫어하지 않나. 내가 그 입장(계산원)이 되니까 고충이 있고, 쉽지 않을 거라고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