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와 드라마를 통틀어 이름만으로 신뢰를 주는 '진짜' 배우를 찾기란 쉽지 않다. 트렌드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아이돌들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면서 오로지 연기력만으로 인정받는 배우가 설 자리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문정희(38)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1994년 개원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1기 졸업생인 문정희는 1998년 연극 '의형제'로 데뷔했다. 하지만 진짜 빛을 보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8년이 흘러 출연한 SBS 드라마 '연애시대'(06)였다. 감우성의 학창시절 첫사랑 유경을 연기한 문정희는 안정된 연기를 바탕으로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찍었다. 이후 '카페 느와르'(09)·'사랑을 믿어요'(11)·'천일의 약속'(11) 등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배역의 경중을 떠나 제몫을 해내는 '연기 보증수표'로 현장에서 인정받았다.
특히 엄마와 아내 역할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줬다. '문정희만큼 맛깔나게 소화할 수 있을까'하는 감탄이 들 정도로 능수능란했다. '연가시'(12)에서 자식을 구하려는 억척스러운 어머니 경순, '숨바꼭질'(13)에선 가난에 찌들어 살고 있으면서 집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주희 역을 맛깔스럽게 소화했다.
2014년에 걸었던 발자취에도 이 흔적이 남아있다. MBC 주말극 '마마'에서 정준호의 아내이자 살림과 교육, 내조 등 못하는 것이 없는 '지교동 여신' 서지은 역을 맡아 열연했다. 함께 호흡을 맞춘 송윤아와의 '합'이 제대로 통하면서 시청률이 치솟았고, 마지막회 시청률 17.7%(닐슨코리아 전국기준)를 기록하며 한동안 주춤했던 MBC 주말극의 부흥을 다시 이끌었다.
최근 나란히 개봉한 영화 '카트'(11월13일)와 '아빠를 빌려드립니다'(11월 20일)에서도 만만치 않은 생활 연기로 놀라운 내공을 선보였다. '카트'에선 비정규직으로 마트에서 일하다 해고 통지를 받은 후 투쟁하는 혜미로, '아빠를 빌려드립니다'에서는 평범하지만 사연 있는 김상경의 아내로 열연한다. 이번 취중토크의 주인공은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묵직하게 연기 외길 인생을 걷고 있는 문정희. 삼청동 알라면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아내' 문정희와 '배우' 문정희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연가시'(12·451만명)와 '숨바꼭질'(560만명)을 보면 흥행배우에요. "모두 기대를 안 했어요. 재밌을 거 같아서 좋은 느낌이 있어 한 건 있었는데 배우로서 그런 감이 있는 건 아니에요. 너무 자연스럽게 했어요."
-'아빠를 빌려드립니다'는 기존 작품과 달리 역할이 무겁지 않아요. "'숨바꼭질' 이후 한 숨 돌리면서 찍은 영화에요. 위트가 너무 좋았죠. 소재 자체가 웃기고, 엉뚱할 수 있는데, 원작(홍부용 작가의 동명소설)을 보니 따뜻하더라고요. 어떤 부분에서는 손발이 오그라들 수 있지만 가끔은 그런 게 정통으로 먹힐 때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상경 씨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극중 10년차 부부인데 합이 잘 맞았어요. 김상경 선배는 망가지는 게 대단해요. '숨바꼭질'을 했기에 편한 걸 하고 싶었고, 가족의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선택한 작품이죠."
-편안한 모습이 연기에서도 보이던데요. "간만에 재밌었어요. 너무 편하게 했죠.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어요. 전작이랑 비교하면 고생을 너무 안하고 찍었죠.(웃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아주 좋을 날씨에 촬영(2013년 8월31일~11월9일)을 했어요."
-김덕수 감독과도 첫 호흡이었죠. "특유의 재기발랄함이 있어요. 노련하죠. 지금은 잘 모르는 사람이 있지만 얼마나 역량을 펼칠 수 있을지 기대돼요."
-영화 속에서 김상경과 방귀를 터는 장면도 있던데요. "처음에는 (특별한 조정을 하지 않고) 사운드 없이 들었는데 너무 이상했죠. 근데 나중에 영화관에서 보고 적나라하게 (효과음 등을) 잘 넣으셨더라고요.(웃음) 10년 부부 관계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편하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이 부분에서 오빠에게 고마운 마음이 많아요. 신선한 것들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리허설도 많이 하지 않고 촬영을 했는데 슛 돌리고 우리끼리 피식하고 웃으면 그게 장면에 다 담겼어요."
-김상경과 태만이 처음부터 연상됐나요. "'아빠를 빌려드립니다' 시나리오를 받고 (김상경 선배가 출연한) '몽타주' VIP 시사회를 갔어요. 김상경이라는 배우가 이렇게 재기발랄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는데, 그 시사회에서 코믹한 모습을 보이더라고요.(웃음) 약간 영구 웃음 같은…그런 게 원래 있으신 분이죠. 따뜻하고 허물없어하는 모습을 보고 합이 너무 잘 맞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죠."
-어머니 역할을 유독 많이 하는데 아쉽지 않나요. "인간인데 서운하고 섭섭한 부분도 있죠. 엄마라고 하는 건 캐릭터를 넘어서 포지션이 강해요. '엄마를 안 해'라고 하면 제한이 훨씬 많아지죠. 어떤 식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을까가 중요해요. 그걸 염두하고 상황과 맞는다면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어떤 작품이 나하고 만나져서 한다는 건 보통 인연이 아니죠. (어머니 역을 하는 것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시간보다 운명으로 오는 작품에 대해서 캐릭터를 생각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러고 보면 인기가 서서히 올랐던 거 같아요. "나라고 답답함이 없었을까요. (내 스스로의) 문제인가 그런 생각이 더러 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 순간을 잘 버텼던 거 같아요. 이렇게 오래 걸렸던 건 내공이 더 필요해서…삶에서 땅에 발을 잘 딛고 현실을 살라는 기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사이 힘들기도 했고, 결혼도 했죠. '인생에서의 재료라는 게 중요하구나'하고 느꼈던 순간들, 돌이켜 보면 오히려 감사한 시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