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장종훈의 41 홈런 얘기다. 1992년 작성된 이것은 한국야구에서 전인미답의 경지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생각은 딱 6년까지만 해야 했다. 1998년 외국인 선수 도입과 함께 등장한 타이론 우즈는 42개의 공을 담장 밖으로 넘기면서 그 해 MVP까지 거머쥐었다. 당시 1998년 10월 2일 중앙일보 스포츠면의 헤드라인 제목은 “우즈 42호포, 한국야구 금자탑“이었다. 이후 17년, 한국야구에서 그들의 존재는 빼놓을 수 없게 됐다. 올해부터 외국인 선수 보유 숫자가 구단 별 3명으로 늘었다. 10구단 체제인 내년부터는 역대 최다인 31명(신생팀 kt는 4명)이 그라운드를 누빈다. 일간스포츠는 2015년의 우즈가, 리오스가 될지도 모르는 그들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에도 한화맨이다. 지난 11일 한화 외국인 선수의 마지막 퍼즐이 된 나이저 모건(34)이 그 주인공이다.
메이저리그 태초에 두 부류의 타자가 있었다. 타이 콥과 호너스 와그너다. 1905년 나타난 타이 콥은 통산 타율 0.367을 자랑하는 타격의 신이다. 100년 넘게 빅리그 역대 최고의 타율 부문 맨 꼭대기에 자신의 이름을 박아두었으며, 평생 한 번 하기도 힘든 4할을 세번이나 기록하기도 했다. 성격 또한 ‘더럽기로’ 최고였다. 골수 인종차별주의자이며 잘 벼린 스파이크 징을 세우고 야수들을 향해 슬라이딩 하기 일쑤였다. 천재이지만, 동시에 독하고 사악한 타자였다. 1897년 데뷔한 호너스 와그너는 달랐다. 타격왕을 여덟 차례나 수상하는 등 타격 재능만큼은 타이 콥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성정은 정반대였다. 콥이 악마라면 와그너는 천사였다. 그는 돈보다 명예를 중시한 그라운드의 신사였다. 자신의 얼굴이 담배 홍보에 이용되는 게 싫어 야구카드의 판매를 중단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으니까(<테드 윌리엄스, 타격의 과학> 발췌. 이상미디어). 여담이지만 이 때문에 작년 12월 그의 야구카드는 40만 달러에 팔렸다. (그의 부탁으로 인해)200장만 발행된 희소성 덕이다. 참고로 호너스 야구카드의 최고 낙찰액은 2007년 팔린 280만 달러.
모건의 대표적인 벤치클리어링 에피소드. 타자가 공을 맞지 않고서도 이것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놀라운 영상이다 ▶영상보기
모건은 호너스 와그너보다는 타이 콥의 유전자를 물려 받았다. 미국의 스포츠전문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는 모건의 그라운드에서 벌인 난동 및 기행을 정리해놨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일주일’ 동안 벌어진 일이다.
8월 25일. 모건은 자신에게 야유를 퍼붓는 필라델피아의 팬에게 공을 집어던졌다. 이 사건은 선수들에게 팬들과는 신경전하지 말라는 불문율을 다시금 각인시켜줬다.
8월 27일.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팽팽한 접전 상황. 8회 루상에 나간 모건은 그 긴장감을 해소시켰다. 견제사를 당했단 얘기다. 타석에 있던 윌리 해리스는 바로 초대형 홈런을 때려냈고, 경기는 2-4로 워싱턴 내셔널스의 패배. 리글맨 감독은 이튿 날 바로 그를 8번 타순으로 내려 앉혔다. 모건은 이날 쌓인 불만을 다음 경기에 시원하게 풀어버렸다. 아래처럼.
8월 28일.주자 모건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전에서 상대팀 포수 브라이언 앤더슨과 홈경합을 시도 했다. 앤더슨은 안방지키기에 크게 관심이 없던 상황인데도 말이다(다른 플레이를 위해 등을 지고 있던 상황이었고, 홈승부는 고려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모건은 그저 앤더슨을 홈에서 밀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모건의 과격한 플레이는 홈플레이트 주변을 험악한 분위기로 만들어놨고, 정작 그는 분노했다. 아, 그렇다고 팀이 점수를 올린 것도 아니었다. 리글맨 감독은 앤더슨과 라 루사 카디널스 감독에게 정식으로 사과해야 했다.
8월 30일.모건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단지 카디널스의 잘못이었어요. 감독님, 당신의 선수를 언론을 통해 비난하지 마세요”
8월 마지막 날의 모건.10회까지 무득점 게임으로 진행되던 지루한 어느 날, 모건은 마이애미 말린스의 포수 브렛 헤이스에게 달려 들었고, 헤이스는 어깨 부상으로 바로 시즌을 접어야 했다. 이어 모건의 타석에서 빈볼이 날라온 건 당연한 결과였고, 그 이상의 상황은 설명을 안해도 알 거라 믿는다. 다음은 경기 후 모건의 항변이다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어요. 날 맞힐 수 있죠. 경기의 일부니까. 그런데 방법이 잘못 됐어요. 어떻게 나 말고도 우리팀 동료를 두 번이나 맞힐 수 있는 거죠?”
아이스하키복을 입고 포즈를 취한 모건. 좌측 하단의 작은 사진은 7살의 '아이스하키선수' 모건
말썽 부리는 아들을 둔 어머니들이 “우리 애가 원래부터 나쁘진 않았어요”라고 대부분 웅변하듯 모건도 원래부터 악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타고난 운동신경을 보인 스포츠 꿈나무였다. 1988년, 7살 소년 모건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캘거리 동계올림픽을 시청하면서 꿈이 생겼다.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겠어” 모건은 바로 아버지를 졸랐고, 8년 후, 브리티쉬 콜럼비아 하키리그에 소속된 버논 바이퍼스에 트라이아웃을 받았다. 결과적으론 불합격. 그러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권토중래하며 결국 퍼시픽 국제 주니어 하키 리그에 소속된 델타 아이스 호크팀에 입단한다. 캐나다의 밴쿠버 지역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인 델타(Delta)시를 연고로 하는 팀이었다.
꿈 많던 체육 소년은 오프시즌에는 방망이를 잡았다. 메이저리그의 꿈도 포기할 수 없어서다. 꿈은 현실이 되었으며, 모건은 1998년 열린 메이저리그 아마추어 드래프트 42라운드에서 콜로라도 로키스에 선택된다. 그러나 아이스하키의 열망이 더 컸던 탓일까. 끝내 계약서에 사인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모건의 성정이 강퍅(?)해진 원인은 이때부터였는지 모른다. 캐나다의 군소도시의 팀에 소속된 유일한 흑인이 살아남는 길은 터프해지는 것밖에 없었다. “확실히 ‘컬쳐 쇼크’였죠. 그러나 난 워낙에 활달한 성격이었고, 상대가 누구든 간에 오픈 마인드로 다가가려 노력했어요. 어떻게 대하든 속 좁게 굴지 않고요”
모건의 마지막 아이스하키팀은 웨스턴 하키 리그(WHL)에 소속된 레지나 팻츠다. 브렌트 파커 당시 감독은 모건에 대해 이렇게 추억했다. 모건과는 1999년부터 2년간 같은 팀에서 뛴 바 있다. “모건은 항상 웃고 있었고,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팀에 좋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죠”
모건은 데뷔전인 무스 조 워리어스전에서 두골을 넣는 등 맹활약했지만, 거기까지였다. 파커 감독은 “모건은 아이스하키 선수로서 평균 정도의 재능을 갖고 있다”며 “엘리트 수준을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에게 맞는 스포츠 종목을 찾길 바랍니다” 7경기 출전에 2골. 모건의 마지막 아이스하키 성적이었다.
때마침 모건이 레지나 팻츠를 떠난 시기와 맞물려 당시 그의 여자친구는 임신을 했다. “이제 하키 글러브를 벗고 야구 글러브를 낄 때가 왔구나” 모건이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은 이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모건은 2001년 왈라 왈라 대학의 야구팀에 입단을 시작으로 방향키를 완전히 돌렸다. 이어 2002년 열린 메이저리그 아마추어 드래프트 33라운드에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지명된다. 모건의 본격적인 야구 인생의 서막이 올랐다. 이제 모건의 해프닝도, 하키도 아닌 본격적인 ‘야구 얘기’를 해보자.
빅리거의 꿈은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건은 입단 후 2008년까지 마이너리그에서 담금질했다. 꾸준히 기량을 올리던 모건은 2006년 이후 매년 3할대를 오가는 타율을 기록하며 빅리거 입성을 재촉했다. 특히 2006년 59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등 매년 두자릿수 이상의 베이스를 훔치며 주루에도 재능을 보였다. 마이너 통산 도루 개수는 236개. 타자 모건보다 외야수 모건은 더 대단했다. 한시즌에만 보살 10개를 기록했으며 통산 FLD%(수비율) 역시 0.978을 찍었다. 우익수로 출전했을 경우엔 1할에 달했다.
모건의 인생 수비. 놀라지 마시라. 이제 대전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일테니. ▶영상보기
모건은 마침내 9월 1일, 자신의 메이저 데뷔 경기를 치렀다. 밀워키 블루어스와의 홈경기에 중견수로 출전한 모건은 1타수 1안타 1볼넷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약 보름 후인 9월 17일 모건은 빅리그에 엄청난 신고식을 치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장기인 수비로 말이다. 6회 휴스턴의 타이 위긴튼이 날린 외야 깊숙한 타구를 중견수인 모건이 전력질주해 담장 근처에서 잡아낸 것이다. ‘더 캐치’. 1954년 월드시리즈에서 윌리 메이스가 했던 그것을 연상케하는 미기였다. “난 어떤 타구든 간에 잡으려 노력합니다.” 보름치 메이저 경력의 모건이 말했다. “펜스까지 난 타구를 따라갔고, 시선을 집중했죠. 그저 멋진 플레이를 만들어보려 했을 뿐이었는데!”
짜릿한 데뷔시즌의 성적은 107타수 32안타, 타율 0.299, 도루 19개였다. 다음해 출전경기를 58경기로 늘리며 자리를 잡아가는 듯 했지만 2009년 시즌 도중 워싱턴 내셔널스로 트레이드 된다. 당시 주전 중견수였던 네이트 맥루스(2008년 골드 글러브 수상, 올스타 출전)와의 경쟁에서 밀려난 탓이다. 역설적이지만 팀을 갈아탄 2009년이 모건의 ‘리즈’ 시절이었다. 자신의 최고 타율인 0.307을 기록했으며, 144개의 안타를 때려냈다. 처음으로 100경기를 넘게 출장하며 풀타임 리거로 활약했던 첫 해이기도 하다. 도루 역시 역대 최고이자 내셔널리그 2위인 42개.
내셔널스에서 풀타임으로 활약한 2010년도 좋았다. 개인 최다인 136경기에 출장했으며, 리그에서 세 번째로 많은 희생번트(15개)를 성공 시켰다. 9이닝당 수비 기여율(RF/9)은 리그 5위인 2.73. 그러나 그만큼 사고도 많았던 해이기도 한데, 그 업적은 위에 설명한 바와 같다. 1만 5천 달러의 벌금을 물고 8경기 출장 정지를 당한 시즌에 이룬 성적이기에 어찌보면 더 대단하기도 하다.
카디널스와 벤치클리어링 후 클럽하우스 인터뷰. "푸홀스와 카펜터가 날 밀쳤다"고 분개한다. ▶영상보기
물론 성격 탓만은 아니리라. 2년 만에 팀을 떠난 이유가 말이다. 모건은 2011년 밀워키 블루어스의 커터 딕스타라와 맞트레이드된다. 플래툰 시스템 탓에 카를로스 고메즈와 중견수 자리를 나눠서 지키며 모건은 벤치를 덥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다시 3할대 타율에 올라섰고, 세자릿수 안타를 치는 등 타격에선 기복이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빅리거의 끝이 보였다. 2012년, 자신의 역대 최저 타율인 0.239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를 떠나 일본으로 향한다. 메이저리그 7시즌 통산 성적은 598경기 출장, 550안타, 120 도루, 타율 0.282이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경험은 모건에게 신선하고도 감동적이었다. 관중석에 공을 집어던진 전과가 있던 모건이 팬사랑을 듬뿍 받은 첫경험을 한 것이다. 특유의 ‘T자’ 세리머니는 금세 팬들에게 각인됐으며 이는 곧 모건의 시그니처가 됐다. 108경기 출전, 0.294의 타율에 11홈런이 그의 일본리그 성적표다. 두자릿수 홈런은 야구 경력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즌 후 모건의 에이전트인 조나단 머러는 “모건에게 일본 생활을 훌륭한 경험이었고, 그 역시 계속 여기서 야구를 하고 싶어했다”고 밝혔다. 모건 역시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수차례 일본 생활의 즐거움을 표현한 바 있다.
위는 모건의 T 세리머니. 아래는 요코하마 지역의 유치원 어린이들이 단체로 따라하고 있는 모습. 훈훈.
그러나 “만족스러운 계약 조건이 성사됐고 모건 또한 미국으로 돌아가길 원했다”다는 에이전트의 말대로 모건은 2014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1백만 달러(옵션 포함)에 계약한다. 아쉽게도 모건이 시즌 대부분을 마이너에서 보내면서(빅리그 15경기 출전) 이 금액은 대부분 받진 못했다. 흥미로운 점은 계약 당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또한 모건의 영입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일부 관계자에 따르면 “피츠버그 구단은 모건에게 스프링 캠프 합류를 권했다”고 한다. 앤드류 매커첸과 그레고리 플랑코가 버티고 있는 외야에 모건을 백업 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안이 이유였다. 물론 물거품이 됐지만 만일 성사됐다면, 우리는 모건을 다른 의미로 알게 되지 않았을까? 한화맨이 아닌 강정호의 팀메이트로서 말이다.
타이 콥은 항상 악당이었을까. 1994년 개봉한 그의 일대기를 그린 <메이저리그의 전설: 타이콥> 이란 영화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자신의 불우한 가정사와는 반대로 식구들은 끔찍히 아끼던 아버지였고, 은퇴 후엔 병원을 지어 사회 기부도 했다. 사람이 한 번 이미지가 굳어지면 바뀌기 힘든 법이다. 설령 사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모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올해부터는 외국인 선수라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엄벌을 내리는 감독도 부임했다. 올시즌 한화의 모건에게 다른 모습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의 ‘T 세리머니’ 만큼은 계속 보고 싶다.
온라인팀=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 사진=베이스볼 레퍼런스, MLB.com, 파이어리츠닷컴, 베이스볼 레퍼런스, 내셔널스 뉴스 네트워크, 모건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