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의 시간. 이제껏 한국프로야구가 보낸 한 시즌, 한 시즌이 어디 특별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겠냐만, 1993년은 다른 의미에서 특별한 해였다. 기성 선수들을 위협하는 괴물 신인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타석에선 양준혁(당시 삼성)과 이종범이, 마운드에선 이대진(이상 당시 해태)과 박충식(당시 삼성)이 입단 첫해부터 리그를 지배했다. 백미는 양준혁이다. 타율 0.341에 130안타 23홈런을 기록하며 신인왕에 등극한다. 이종범도 그에 못지 않다. 73개의 베이스를 훔치며 ‘바람의 아들’이란 별명을 얻은 그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다. 박충식은 14승 12패 평균자책점 2.54, 이대진은 10승 8패를 기록하며 둘 모두 데뷔 첫해 10승을 달성했다.
올시즌 흥행을 우려하는 이유는 하나다. 바로 스타 선수들의 부재. 김현수, 박병호 등 지금껏 팬들을 몰고 다니던 간판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로 떠난 탓이다. 그러나 본디 빈자리는 새 물결로 채워지는 법이다. 올해는 ‘응답하라 1993’이 될 가능성이 크다. 벌써부터 기대감을 불러 모으는 수퍼 루키들이 눈에 띈다. 제2의 양준혁이, 제2의 이대진이 될 선수는 누구일까. 앞으로 10년 이상 KBO리그를 책임질 스타들을 찾을 기회다.
★정영일-못다 핀 메이저의 꿈, 한국에서
아직 KBO리그 1군 무대에서 공 한 개도 던지지 않았지만 많은 주목을 받은 선수다. 1988년생으로 올해 나이 스물 여덟. 팀 동료이자 프로 10년차인 김광현과 동갑이다. 늦깎이 신인.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스타였던 선수. 돌고 돌아 이제야 국내 야구팬들에게 첫 선을 보인다. 바로 SK 정영일이다.
2006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정영일은 경기고를 상대로 13.2이닝을 던져 23개의 삼진을 빼았는다. 국내외의 스카우트들은 당연히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정영일이 택한 것은 미국행이었다. 그해 7월 LA 에인절스와 110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빅리그의 벽은 높았다. 데뷔 첫 해인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싱글A를 전전하며 3시즌 통산 2승 2패 평균자책점 5.35를 기록한다. 메이저의 마운드는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다.
<마이너 시절 정영일의 피칭 모습>마이너>
한국으로 돌아온 그가 안긴 곳은 김성근 감독의 고양 원더스다. 2011년부터 내리 3년을 여기서 재기를 위해 땀을 흘렸다. 마침내 2014 신인 2차 지명회의에서 5라운드 8순위로 SK의 선택을 받는다. 그러나 한국 프로 데뷔엔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작년까지 상무에서 51경기에 나와 3승 1패 17홀드 평균자책점 4.66을 기록하며 복귀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올해 SK의 불펜은 공백이 많이 생겼다. 정우람과 윤길현이 떠났지만 뾰족한 대안은 없다. 정영일은 SK에서 ‘이보다 강한 잇몸’이 될 수 있을까.
★이케빈-삼성의 희망이 되어
작년 이맘 때 구자욱의 열풍을 보는 것 같다. 삼성의 신인 투수 이케빈을 향한 주목도가 심상치 않다. 류중일 감독은 미국 괌에서 열리는 스프링캠프 명단에 일찌감치 그를 포함시켰다. 2016 KBO 신인 드래프트 2라운드 1순위로 이케빈을 택한 삼성이다. 이전 해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에도 참가했던 그는 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이케빈은 파워 피처다. 150km가 넘는 직구를 구사한다. 프로 2군과 치른 연습 경기에서는 직구의평균 시속이 145km를 기록했을 정도란다. 재미동포 2세로 대학교 때까지 미국에서 야구를 했다. 그러나 편히 훈련을 해왔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의 아버지는 단돈 5만 원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을 던졌지만 빅리그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멈출 순 없었다. 이케빈은 “날 위해 뼈 빠지게 고생한 아버지를 생각하면 야구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참조기사: “박병호와 붙고 싶다” 23세 이케빈 ‘코리안 드림’
입단 실패 후 한국으로 들어와 고양 원더스를 찾았다. 2014년을 꼬박 거기서 보냈다. 영어 학원에서 일하며 생계비를 벌고, 끝나면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삼성은 그의 잠재력을 봤고, 선택했다. 이케빈은 9일 한 스포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의 희망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다짐대로 삼성은 지난 해 놓친 우승을 다시 탈환할 수 있을까.
★남태혁-댄블랙을 잊게 해줘
해외 진출한 뒤 국내로 유턴한 선수가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를 차지한 건 그가 처음이다. Kt로 입단한 메이저리그 출신의 남태혁 얘기다. 2009년 인천 제물포고 시절부터 거포 유망주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그 해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 계약을 맺었다. 제2의 최희섭을 꿈꾸며 내딛은 첫 발걸음이다. 이듬 해 LA 다저스 산하 루키 리그에서 40경기에 출전해 타율 0.243에 3홈런을 기록했다. 2012년엔 팀 역사상 14년 만에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 해 남태혁이 기록한 타율은 0.256. 메이저 입성이 머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오른쪽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으며 차질이 생겼다. 결국 마이너 4시즌 통산 타율 0.241에 97타 9홈런이란 기록을 남기며 미국 생활을 마쳐야 했다.
고심 끝에 그가 택한 길은 한국이었고, 그를 맞이한 이는 막내 구단인 kt였다. 올시즌 상황은 나쁘지 않다. 작년 1루와 중심타선을 책임지던 댄블랙이 떠나며 공백이 생겼다. 남태혁으로서는 충분히 노려볼 만한 기회다. 댄블랙의 52번을 물려 받은 그가 kt에서 뒤늦게 만개하는 모습을 기대해 보자.
★김재성-LG 안방마님 네 축의 하나
LG 경기를 꼬박 챙겨 본 열혈팬이라면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김재성은 2015 신인드래프트에서 LG가 1차 지명한 선수다. 지난 해 7경기에 나와 7타석에 들어서며 1볼넷 2삼진이라는 소박한(?) 성적표를 남겼다. 짧은 만큼 강렬한 장면도 있었다. 작년 9월 8일 잠실에서 열린 한화와의 경기에서 포수로 출장한 김재성은 인상적인 플레이를 해냈다. 10회초 한화의 공격 상황. 1루에 있던 정근우가 도루를 감행하자 김재성은 주저없이 공을 뿌렸다. 비디오 판독 결과 정근우의 아웃. 그 해 도루 성공률 78%를 자랑하던 발 빠른 주자를 잡아낸 것이다.
김재성의 활약에 따라 LG의 안방 상황이 달라진다. 지난 시즌 유강남이 700.1이닝, 최경철이 541.2이닝씩 포수를 소화했다. LG는 SK, 한화, KIA,와 더불어 800이닝 이상을 소화한 포수가 없는 구단이다. 게다가 최경철은 만 서른 여섯의 베테랑이며, 유강남은 풀타임을 처음 소화한 젊은 선수다. 여기에 자유계약선수로 LG 유니폼을 입은 정상호가 가세했다. 신인 김재성은 이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