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인의 '풀꽃'처럼 황석정(45)도 오래, 자주 보면 더 매력 있는 배우다. 1992년 한양대 출신을 중심으로 출범한 극단 한양 레퍼토리에 들어가며 연기를 시작한 황석정. 연기한 지 20년의 세월이 훌쩍 넘어 비로소 영롱한 빛을 보고 있다. 단역부터 시작해 힘든 무명 세월이 꽤 길었지만, 연기는 도를 깨우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왔다. "도대체 연기의 끝에 뭐가 있나 끝까지 가보자"는 오기도 있었다.
황석정이 얼굴을 알린 건 2014년 방영된 tvN '미생'의 힘이 컸다. 원작 웹툰과 100% 싱크로율을 자랑한 그의 외모와 연기에 대중들의 시선이 단박에 집중됐다. 이어 MBC '그녀는 예뻤다'에서 "모스트스럽게"와 "맘마미아"를 외치며 개성 넘치는 화려한 비주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디까지가 애드리브인지 좀처럼 짐작할 수 없는 능청스러운 연기는 그의 매력을 배가시켰다. MBC '나 혼자 산다'에서 보여준 여배우의 민낯과 생활, 영화 '더 폰'에서 보여준 의리파 캐릭터 등도 인상적이었다.
황석정은 올해 충무로에서 그 상승세를 이어간다. 지난해 매니저도 없이 전남 고흥과 서울을 힘들게 오가며 찍었던 영화 '순정'으로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체력적으로는 고단했지만, 따뜻한 울림이 있는 영화고, 촬영장 분위기가 좋아 심적으로는 힐링을 했다는 황석정. 건조한 현대사회에 잔잔한 따뜻함을 선사하는 '순정'을 위해 "개인적인 얘기를 너무 많이 하고 싶지 않다"던 그가 마음을 돌려 취중토크 자리에 앉았다.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했어요. 그런데 현재는 연기를 하고 있죠.
"인간의 자유는 쉽게 말해 '해탈'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자유는 스스로 자기를 통제하는 것인데 자기를 통제하려면 자기가 누군지 정확하게 알아야 해요. 자기가 자기를 정확하게 알아야 자유니까요. 내가 모순에 가득 차 있다는 걸 연기하면서 알았어요. 나를 알아가면서 남을 이해할 수 있는 큰 힘이 됐기 때문에 연기를 하고 있어요. 사람을 만나고 끊임없이 갈등의 구조 속에 있고 문제 속으로 들어가고 그러면서 깨우침을 주는 게 연기거든요. 국악을 그만뒀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살다 보니 연기를 하게 된 건데 그 안에 다 있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연기하다가 국악을 하게 된다고 해도 연기했던 게 국악으로 갈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연기하는 걸 후회하지 않아요."
-처음 연기의 매력에 빠진 날이 궁금해요.
"한양레퍼토리 극단의 창단극(연극)이었어요. 제목이 '블루스 브라더스'였던 것 같아요. 근데 사람이 무언가 하나 때문에 확 변하지는 않잖아요. 그 전부터 전조가 있고 연결되는 시작점들이 점점 이어지면서 폭발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시점에 여러 연극을 보면서 연기의 매력에 쑥 빠진 것 같아요. '한양레퍼토리' 멤버가 돼 (설) 경구 형과 같이 공연을 했었는데 제게 꼭 연기를 계속 하라고 했어요. 그 말이 뭔가 큰 힘이 됐어요. 그래서 이번에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때문에 얼마 전에 만났는데 그때 그런 얘기했던 걸 기억하느냐고 물으니 기억이 난다고 하더라고요. 3월에 또 만나기로 했는데 그때 자세한 이유를 물어보려고요."
-극단 한양레퍼토리 당시 설경구·권해효 등과 각별한 사이였던 걸로 알고 있어요.
"저와 같이 연기했던 사람은 다 은인이에요. 연기를 정말 잘해서 그들을 보고 들어간 거니까요. 특히 해효 형은 제게 너무나 큰 선배죠. 어렵고 힘든 후배들을 항상 아무도 모르게 많이 도와줬고,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사람이거든요. 연기할 때 늘 성실하고 진지해요. 이대현 선배랑 이정은 씨도 좋아해요. 천사예요. 정말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아요. 그분들이 보여준 좋은 모습과 호의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후배들에게 나 역시 그런 선배가 되고 싶어요."
-연기와 음악의 장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어렸을 때부터 외모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처음엔 두려움이 많았어요. 연기는 외모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하니까요. 전 남을 의식하는 사람이었고, 남보다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비애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배우는 비판을 다 받을 수 있는 위험한 직업이잖아요. 하지만 음악은 아니에요. 악기라는 매개가 있어요. 얼굴이나 몸보다 제 노래, 연주를 들어요. 음악할 때는 연습을 아주 열심히 하면 어느 순간 음악과 혼연일체가 되는 느낌이 있어요. 하지만 연기는 끊임없이 이성적이어야 해요. 그게 좀 다르더라고요. 연기는 하면 미쳐서 하는 줄 알지만, 수많은 약속 안에서 수많은 걸 지켜가면서 해내야 해요. 그래서 연기는 자기 통제를 굉장히 잘해야 해요." -연기할 때 애드리브가 많나요.
"사람들이 보기엔 제가 하는 게 다 애드리브처럼 보이는 것 같아요. MBC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 속 애드리브는 이태리말이 전부였어요. 나머진 다 대본에 있는 걸 그대로 한 거에요. tvN '미생'도 그대로 했어요. 전 팔짝팔짝 뛰는 사람이에요. 안정적인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까 연기도 약간 안정적으로 하지 않는 것 같아요. 급작스럽거나 리듬이 엇박자로 나오기도 하죠. 도발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애드리브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근데 애드리브를 잘 안 해요. 애드리브는 상대 배우에게 무조건 허락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대가 당황할 수 있고, 기분이 나쁠 수 있잖아요. 작품에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녀는 예뻤다' 출연 후 인기 실감했나요.
"연기하면서 그런 걸 피부로 잘 못 느껴요. 어딜 나가야 아는데 일 끝나면 집에 가서 잠 잘 시간도 별로 없거든요. 근데 '그녀는 예뻤다' 할 때 초등학교 남학생들이 '모스트스럽게'를 따라 하면서 절 귀여워하더라고요. 동화책을 보면 마녀가 나오는데 그 마녀랑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다 가지고 있으니까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모스트스럽게'란 대사의 특징을 어떻게 잡았는지 궁금해요.
"영어 단어의 강세와 장단음을 따라 한 거예요."
-'그녀는 예뻤다'에서 보여준 메이크업·의상·헤어 등도 정말 화제였어요.
"MBC 의상팀과 서로 아이디어를 내고 합작해서 만든 거에요. 처음에 머릿속에 뭔가 그림이 있었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배우로서 돈이 많지 않으니까 비싼 걸 입을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하면 이 배역을 하면서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해줄까', '통쾌하게 해줄까' 고민하다가 그런 의상 콘셉트를 만들었어요. 날 통해서 기분 좋게 만들고 위안을 주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