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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481. 마산의 추억
지금은 창원시 마산구라는 행정구역만 남았지만 과거 마산은 예술과 교육의 도시로 유명했다. 마산고, 마산여고, 마산상고는 명문고로 정평이 나 있었고, 아름다운 남해를 바라보는 마산을 배경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곡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은 마산을 배경으로 만든 노래였다. 이 노래로 '고향의 봄'은 마산뿐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고향의 봄을 대표하는 곡이 됐다. 또 이은상의 시에 김동진씨가 작곡한 가곡 '가고파'의 첫 구절 ‘내 고향 남쪽바다~’에 등장하는 고향도 역시 마산이다. 이은상씨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마산을 그리워하며 '가고파'를 썼고, 이 시가 가곡으로 재탄생해 한국을 대표하는 명곡이 됐다.
그뿐 아니라 마산은 4·19 발발 직전 3·15 부정선거를 최초로 고발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했다. 만약 마산에서 부정선거가 발각되지 않았다면 이승만 독재정권은 쉽게 막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는 유신독제체제를 반대하는 부마항쟁이 일어난 곳이기도 했다. 두 번의 독재정권을 거세게 흔든, 민주주의의 선봉에 서 있던 도시가 바로 마산이었다.
나는 그런 마산과 인연이 깊다. 1956년 2월 아버지께서 진해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리고 그해 여름 아버지는 나를 지프차에 태우시고 신작로를 따라 마산의 어느 로터리 2층에 있는 중국집에서 탕수육을 사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마산은 구마산과 신마산으로 편의상 나눠 부르고 있었다. 1956년 화력발전소가 생기면서 신마산은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
1957년 초, 아버지는 공주경찰서장을 지내시다가 마산경찰서장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어린마음에 마산으로 간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맛있게 먹던 탕수육, 아름다운 남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인사정보가 누출되었다면서 아버지의 마산 발령이 취소되는 바람에 며칠 동안 시무룩해있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할아버지께서 이런 예언을 하셨다고 한다. ‘나의 대를 잇는 사람은 합포(지금의 마산) 여인과 결혼할 것이다’ 나는 그 예언이 틀리기 바랐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경상도 여인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결국 마산여자를 만나 이제까지 42년을 잘 살고 있다. 역시 이런 걸 천생연분이라고 하는지.
우리가 결혼한 날은 3월 11일이었는데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결혼식 준비도 제대로 못했고, 친척들에게 알리지도 못했다. 결혼식 당일에야 겨우 직장에 말을 하고 식장으로 뛰어갔더니 신랑 측 하객석은 텅텅 비었고 신부 측에만 사람이 가득 찬 반쪽자리 결혼식이 되고 말았다.
42년 전, 아내를 처음 만나 마산에서 먹었던 꼬시락이 생각난다. 그때 꼬시락집은 아직도 잘 있는지, 처갓집은 어떻게 변했는지, 또 아버지와 함께 탕수육을 먹던 로터리 중국집은 그대로 있는지, 그동안 벼르기만 했었는데 올해는 아름다운 마산의 봄이 다 가기 전에 꼭 한 번 다녀오고 싶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