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세 토티를 전혀 안 봐주고 훈련시키는 스팔레티 감독, 그 힘든 훈련을 군소리 없이 소화하는 토티. 역시 클래스는 살아있더라고요."
독일 등으로 연수를 갔다가 70일만에 돌아온 황선홍 전 포항 스틸러스 감독은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난 3일 성남 정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황 감독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축구 이야기를 시작하자 얼굴에선 금세 생기가 돌았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포항 지휘봉을 내려놓은 황 감독은 지난 2월 독일과 이탈리아 연수를 떠났다.
지난달 30일 오전에 귀국한 황 감독은 곧바로 같은 날 오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서울과 수원 삼성의 '슈퍼매치'를 찾았다. 또 이튿날엔 성남 탄천종합운동장에서 펼쳐진 성남 FC와 광주 FC의 맞대결을 지켜봤다. '숨 돌릴 시간도 없었겠다'고 묻자, 황 감독은 "어제까지 내가 유럽에서 본 축구와 K리그를 조금이라도 빨리 비교해 보고 싶었다"며 웃었다.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 모두 축구에 올인하고 있는 지도자 황선홍에게 '축구이야기 최신판'을 들었다.
-유럽에서도 축구를 위해 '강행군'을 펼쳤다고 들었다.
"3개 구단을 경험했는데 시간이 촉박했다. 헤르타 베를린·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AS로마 구단에서 3주씩 지냈다. 이 기간 독일과 이탈리아 팀들의 경기를 최대한 많이 보려 했다. 독일에선 도르트문트-함부르크-레버쿠젠에서 금토일 하루씩 거치며 3일 연속 분데스리가 경기를 본 적도 있다. 리그와 청소년 경기를 합쳐 유럽에서 30경기 정도는 본 것 같다. 부산과 포항을 이끌던 시절과 비교 분석이 됐다."
-한국과 유럽의 간극은 많이 줄었다는 생각을 했나.
"예전보다는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차이는 존재하더라. 독일에서 안익수 감독이 이끄는 19세 이하팀과 독일팀의 평가전을 봤다. 신체적으론 과거처럼 큰 차이가 없는데 아직도 기술적인 면에서 부족하다. 예전엔 우리 선수들의 덩치가 작아 스피드로 큰 유럽 선수들을 돌파하면 됐지만 이제는 과거의 속도 싸움으로는 한계가 있다. 결국 기술을 갈고 닦아야 한다."
-유럽 연수를 통해 추구하는 축구는 바뀌었나.
"이번 경험이 틀립없는 플러스 요인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내 축구 철학이 바뀐 것은 아니다. 우리가 유럽 강호처럼 정유율을 높이는 축구를 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축구의 경쟁력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가 됐다. 답도 나왔다. 역시 빠르고 세밀한 축구를 발전시키는 방법뿐인 것 같다."
-차두리와도 만났다.
"무슨 얘기겠나. 밥 먹으며 축구 얘기만 3~4시간 동안 한 것 같다. 그 친구도 은퇴를 해 지도자의 길을 걸으려 하고 있다. 고민이 많다. 결국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좋은 것을 보고 느끼지만 우리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쉽지 않다."
-유럽 구단을 보며 인상 깊었던 장면은.
"프란체스코 토티의 훈련과 시합이었다. 한일 월드컵 당시 뛰던 친구가 아직도 현역으로 뛰는 것도 대단한데, 그런 40세 토티를 전혀 안 봐주고 젊은 선수들과 똑같이 훈련시키는 루치아노 스팔레티 로마 감독도 대단하더라. 압권은 지난달 21일 열린 로마-토리노전이었다. 토티는 팀이 1-2로 뒤진 후반 40분에 교체 투입됐는데 3분만에 2골을 넣으면서 승부를 뒤집었다. '역시 클라스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유럽 리그는 아무리 약팀이라도 K리그에 비교하면 (이)동국이나 (황)의조 같은 해결사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골잡이들의 존재는 리그에 대한 흥미와 기대감과 직결되는데 부러웠다."
황 감독이 유럽에 간 새 K리그에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K리그의 '슬로우스타터'로 유명한 최용수 감독의 FC서울이 올 시즌 초반부터 독주를 이어가고 있다. 최 감독의 서울은 최근 몇 시즌간 황 감독의 포항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팀이다.
-유럽에 머무르는 동안 K리그에선 FC 서울의 독주가 주목을 받고 있다.
"어후~, FC 서울 좋더라고요. 그렇지만 시즌은 1년입니다. 지금은 봄이고요. 끝까지 봐야죠. 하하"
-최용수 감독에게도 한마디 했나.
"얼마 전에 최 감독에게 '잘나간다'고 농담했더니 웃더라."
선수 시절 황 감독은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끈 한국축구의 대표 스트라이커였다. 그는 지도자로도 화려한 성적을 남겼다. 황 감독은 2010년부터 지난 시즌까지 포항을 맡아 한 번의 정규 리그(2013년) 우승과 두 번의 FA컵(2012·2013년) 정상을 맛 봤다. 나머지 시즌도 모두 4위 내에 들었다. 덕분에 그는 선수와 지도자의 심리를 모두 잘 이해하고 있다. 2016 리우 올림픽을 앞둔 신태용 감독과 '와일드카드(23세 초과 선수)' 손흥민(24·토트넘)의 마음도 잘 알고 있었다.
-소속팀에서 주전경쟁에 어려움을 겪은 손흥민이 일찌감치 신태용호의 와일드카드로 낙점받았다.
"나도 지난 1996 애틀란타올림픽 당시 와일드카드로 출전했다. 참, (최)용수가 당시 나 때문에 1, 2차전을 못 뛰었다, 하하. 올림픽 같이 큰 무대에선 후배들이 신뢰할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을 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올림픽팀에 손흥민 만큼 경험이 많은 선수가 또 있을까."
-올림픽 같은 단기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꼽으라면.
"짜임새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화려하게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 끈적끈적한 조직력과 동기부여가 중요하다. 2차전 독일전이 승부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신 감독이 워낙 팀을 잘 이끄는 지도자라 착실히 준비하면 리우에서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축구를 보고 있으면 다시 팀을 맡고 싶은 생각은 안 드나.
"사람은 현장에 있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하하. 지금은 감정적으로 나를 다스리는 시간이다. 승부의 세계에 살면 각박해지고 섬세한 부분들을 놓치기 쉽다. 아직은 이 시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