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은 1947년생. 내년이면 고희다. 비슷한 나이대의 여배우들과 비교했을 때 윤여정은 단연 돋보이는 행보를 보인다.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드는 것은 기본, 예능까지 출연하며 폭넓은 팬 층의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엔 영화 '계춘할망(창 감독)' 타이틀롤을 맡아 관객과 만나고 있다. '계춘할망'은 잃어버린 손녀 혜지(김고은)를 12년 만에 만난 '손녀바보' 계춘할망의 이야기를 그린 가족 감동 드라마. 윤여정은 가족의 의미와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캐릭터를 분했다. tvN 금토극 '디어마이프렌즈'에도 출연 중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대차고 화끈한 65세 오충남 역을 열연 중이다.
-'계춘할망' 출연 제의를 처음엔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처음에 시나리오를 받고 굉장히 잔잔하고 아름다운 얘기라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게 상업영화가 될까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작사 대표한테 '제 나이에 인디 영화는 도전 못 해요'라고 했더니 상업영화로 제작된다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도 고민이 많았어요. 계춘할망이 제주도 해녀 캐릭터인데 대표한테 '저처럼 도시적인 이미지가 이 영화에 맞을까요? 더 잘 어울리는 배우와 하세요'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대표가 '선생님, 이미 도회적인 이미지는 소진 되셨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았고 한 편으로는 재밌었어요. 그래서 삼청동에 만나서 얘기를 하는데 계속 의견을 굽히지 않고 '도회적인 이미지가 소진됐으니 같이 하시죠'라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좋았어요. 그 말이 나를 도전하게 했죠.(웃음)"
-영화 속에선 얼굴에 주름과 잡티를 더 그리는 등 분장을 했어요.
"비주얼적으로는 정말 끔찍하더라고요. 분장을 했는데 후유증이 오래갔어요. 피부는 빨개지고, 머리칼은 옥수수 수염처럼 푸석푸석하게 됐어요. 안 그래도 늙어서 머리카락이 하얗고 힘도 없는데 거기에 더 염색을 하고 매일 분장하면서 얼굴에 알코올을 바르다보니 피부랑 머리칼이 온전할 수 없었죠. 머리카락이 나중엔 부서졌어요. 아직도 회복이 덜 됐어요. 고생하고 있어요."
-연기하면서 공감도 되고 뭉클한 부분도 많았을 것 같아요.
"계춘할망이 혜지를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을 연기할 때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개인적으로 어릴 때 증조 할머니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서 추억이 많지 않고 오히려 증조 할머니와의 추억이 많아요. 내가 독자 집안에서 몇 십년 만에 태어났거든요. 쉰 살 넘어서 증조 할머니가 저를 보셨으니 얼마나 예뻤겠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증조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어릴 때 할머니가 음식을 입으로 씹어서 주면 그게 너무 싫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서 할머니 마음을 너무 몰랐던 것 같아요. 할머니는 생전 후덕하고 따뜻한 분이라 천국에 가셨을텐데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중에 죽어서 할머니를 만나면 그때 무릎 꿇고 고맙고 죄송했다고 하고 싶어요. 이 작품을 하면서 할머니 생각을 많이 했고, 할머니에 대한 속죄하는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김고은을 혜지 역에 적극 추천했다고 들었어요.
"그게 오해가 있어요.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배우 캐스팅에 관여하겠어요. 전 그런 힘은 없어요. 다만, 혜지 역에 누가 좋겠냐고 의견을 물어보길래 그때 마침 김고은이 출연한 '은교'를 좋게 봐서 고은이 얘기를 했어요. 고은이를 캐스팅하라고 한 게 아니라 의사를 물어보니깐 답했을 뿐이지 먼저 김고은을 추천한 게 아니었어요. '은교'를 보는데 김태희처럼 미인형 얼굴은 아니지만 그 아이의 눈에 담긴 느낌이 좋더라고요. 영화에서 박해일을 바라보는 눈이 좋았어요."
-김고은과의 촬영은 어땠나요.
"처음에 만나자마자 안고 너무 싹싹하게 다가오면 전 오히려 그게 어색하거든요. 취향의 문제인거겠지만요. 김고은은 쭈뼛쭈뼛 다가왔어요. 근데 전 그게 더 좋았어요. 처음에 어색한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거잖아요. 또 촬영장에서 자기가 주어진 역할을 잘하면 예뻐보이는 게 당연한데 그걸 잘하니 예뻤죠. 전작에서 전도연이나 김혜수한테 잘 배웠는지 연기도 잘 하고, 촬영이 끝난 후에도 가끔 명절 때 마다 문자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한 번은 '선생님이 찾는 스타일의 안경을 발견했어요'라며 문자도 왔더라고요." -타이틀롤이라 부담은 안 됐나요.
"타이틀롤은 '하녀' '충녀' 이후 처음이었어요. 근데 관객들이 '계춘할망'의 뜻도 잘 모를 것 같고, 주인공이나 타이틀롤에 집착할 나이도 아니고 그래서 제목을 바꾸라고 했어요. 제목을 김고은 위주로 정하라고 했는데 타이틀을 바꿀 생각을 안하더라고요. 김고은이 핫한데 왜 그런 아이 위주로 제목을 안 바꿨는지 모르겠어요."
-요즘 웬만한 영화나 드라마 현장에 가장 가장 연장자일텐데 쓴소리도 하나요.
"영화 스토리나 편집엔 절대 관여하지 않아요. 그겐 감독의 몫이니깐요. 다만 일을 진행하는데 현장에서 답답한 부분이 보이면 꼰대 노릇을 하죠. '계춘할망'을 찍을 때 살아있는 장어를 손으로 잡고 앞치마에 넣는 장면이 있었는데 180cm가 넘는 젊은 남자 제작 스태프가 장갑을 끼고도 장어를 잡지 못 하고 세팅을 하지 못 해서 좀 답답했어요. 전 촬영할 때 맨손으로 잡아야했는데 장갑을 끼고도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니 그걸 보는 게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어차피 좋은 소리를 해도, 쓴 소리를 해도 제 나이엔 꼰대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어요. 어차피 들을 바엔 그냥 지금 하던대로 하려고요."
-tvN 드라마 '디어마이프렌즈'에선 연장자가 아니죠.
"거기선 나이가 중간 정도예요. 촬영장 가는 게 정말 즐거워요. 우리끼리 연기를 하는건지 실제 상황인건지 헷갈릴 정도로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 촬영을 하고 있어요. 모여있기만 해도 즐거워요. 고두심도 그렇고 (김)혜자언니도 그렇고 다들 서로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친하거든요. 젊을 때 다 같이 드라마에서 활동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각자의 드라마에서 엄마로 활동하게 되면서 한 작품을 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작품 덕분에 다시 모이게 됐죠. 드라마 포스터 찍는 날 다같이 만났는데 혜자 언니가 손을 잡으면서 '노희경 작가가 우리 죽기 전에 한 번 다같이 만나게 해주려고 이 작품을 썼나보다'라고 말하는데 울컥하더라고요."
-노희경 작가가 쓴 황혼의 이야기에 공감이 가나요.
"아니 그 작가는 아직 우리 나이도 안 됐으면 어쩜 그렇게 늙은이 얘기를 잘 아는지 신기해요. 진짜 늙은이 이야기를 현실감 있게 썼더라고요. 매의 눈을 가진 것 같아요. 사실 나이가 많고, 젊은 친구들 보다 경험이 더 많다 뿐이지 감정에 있어선 늙으나 젊으나 똑같거든요. 그걸 정말 잘 쓴 것 같아요."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부담감은 없어 보여요.
"얼마 전 JTBC '비정상회담'은 영화 홍보차 나간거죠. 예전에 '무릎팍도사'나 '힐링캠프'도 마찬가지였어요. tvN '꽃보다 누나'는 처음에 나영석 PD가 '꽃보다 할매'를 하자면서 제안을 하길래 그게 '꽃보다 할배'랑 뭐가 다르냐고 싫다고 했어요. 그리고 며칠 뒤 나PD가 전화와서 '선생님을 만나고 와서 부끄러웠습니다. 자기 복제를 한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리고 나서 '꽃보다 누나'를 할 줄은 몰랐어요. 타이틀이 '꽃보다 누나'라는 걸 알았다면 출연 안 했을 것 같아요. 처음엔 '꽃보다 여배우'라고 해서 했거든요. 그래도 나 PD랑 하면서 여러가지로 재밌었어요. 또 나 PD는 굉장히 사려가 깊은 사람이라서 촬영하는 내내 기분도 좋았어요.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나 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면 좋거든요. 근데 오랜만에 나 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서 반가웠어요. 머리도 좋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