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 컵에선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가 중상위권 클럽 세비야가 3회 연속 우승의 대업을 달성했다.
챔피언스리그도 마찬가지다. 2014년 레알 마드리드, 2015년 바르셀로나에 이어 올 시즌 역시 스페인 클럽이 '빅 이어(챔피언스리그 트로피 애칭)'를 만질 준비를 마쳤다.
2015~2016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29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주세페 메아차에서 '마드리드가(家) 집안 싸움'으로 치러진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충돌한다. 마드리드가 '세계 축구의 수도'로 불리는 이유다.
공교롭게도 이들의 결전지 밀라노는 '과거' 유럽 축구의 수도였다. 주세페 메아차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 AC 밀란과 인터 밀란은 2000년대 중반까지 이탈리아와 유럽 축구를 지배했다. 하지만 이제 이들은 안방에서 남의 집 축제를 구경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미국 일간지 USA투데이는 27일(한국시간) 이를 두고 "마드리드 두 거함이 밀라노에서 결승전을 치른다. 스페인 축구 전성시대다"라고 말했다.
이어 "동시에 이는 밀란의 두 클럽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며 "AC 밀란과 인터 밀란은 물론 이탈리아 프로축구의 전반적인 문제가 다시 드러나고 있다"이라고 분석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리는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
◇ 좀처럼 듣기 힘든 응원 구호 'FORZA', 이젠 'VAMOS'가 더 익숙해
1990년대 유럽 축구 중심은 단연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 A 였다. '별들의 전쟁' 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 컵 결승 대진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탈리아 구단은 1989년부터 1999년까지 11번 열린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총 9차례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그중 4차례 우승(AC 밀란 3회·유벤투스 1회)을 차지했다.
유로파 컵은 이탈리아 '독무대'였다. 세리에 A 클럽은 이 기간 동안 1995~1996시즌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고 10번이나 결승 무대를 밟았다. 이들은 그중 우승 트로피를 8차례나 들어올렸다. 또 8번 결승전 중 4번은 이탈리아 클럽 간의 맞대결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상황은 크게 변했다. 매 시즌 유럽 대항전 결승마다 울려 퍼졌던 'FORZA(이탈리아어로 '힘내자'라는 의미)'는 잊혀졌다. 이젠 'VAMOS(감탄의 의미로 쓰이는 스페인어)'가 더 익숙하다.
2000년 이후 이탈리아 클럽이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건 총 3번(AC 밀란 2003·2007 / 인터 밀란 2010)이다. 그 사이 스페인 클럽이 약진했다. 이탈리아(12회)는 챔피언스리그 최다 우승국 자리를 스페인(15회)에 내준 지 오래다.
UEFA 컵은 더욱 심각하다. 이탈리아 구단은 1999년 파르마 우승 뒤 단 한 차례도 결승 무대를 밟지 못했다. 지난 시즌까지 스페인과 함께 최다 우승국이었던 이탈리아(9회)는 올 시즌 세비야가 우승해 2위로 밀려났다.
과거 이탈리아 클럽을 대표했던 '밀라노 형제' AC 밀란과 인터 밀란은 더 이상 강팀이라 보기 어렵다. AC 밀란은 올 시즌도 7위로 마감해 3년 연속 유럽 대항전 진출에 실패했다. 올 시즌을 4위로 마친 인터 밀란은 5년째 챔피언스리그 본선에도 오르지 못했다. 유벤투스만이 이탈리아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 이탈리아 축구계 한파 불러온 '유럽 경제 위기'
움베르토 간디니 AC 밀란 대표이사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축구 현 주소에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변했다. 특히 AC 밀란은 2008년 불어닥친 유럽 경제 위기 뒤 급격히 추락했다"고 말했다.
간디니 대표이사는 또 "이제 세리에 A는 선수들이 잠시 머무는 리그로 전락했다.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이탈리아에서 뛰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더 이상 세리에 A에는 그들을 머무르게 할 힘이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탈리아 프로축구는 유럽 경제 위기 역풍에 휘청거렸다. 스타 플레이어들의 해외 리그 이적은 물론 구단 경영권 마저 외국 자본에 넘어가고 있다.
AC 밀란 공수를 대표했던 스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35)와 치아구 시우바(32)가 2012년 동시에 파리 생제르망(프랑스)으로 떠난 것은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다.
움베르토 간디니 AC 밀란 이사.
그간 굳건히 지켜웠던 구단 경영권도 중국발 '황사 머니'에 넘어간다. 지난 13일 이탈리아 언론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AC 밀란 구단주는 중국 측에 구단 지분을 매각하는 것을 합의했다. 중국 자본은 AC 밀란 부채 약 2억5000만 유로(약 3500억 원)를 탕감해 줄 예정이다. 이들의 라이벌 인터 밀란은 이미 지난 2013년 인도네시아 재벌에 구단 지분 70%를 넘겨줬다.
간디니 대표이사는 스페인 축구계가 이탈리아와 달리 경제 위기를 극복한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탈리아 클럽 경영권은 구단주 한 명이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스페인은 다르다"며 "스페인 클럽은 다양한 임원들이 구단 경영권을 나눠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클럽을 경영한다"고 분석했다.
이어 "이는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와 같은 스페인 클럽들이 여전히 좋은 성적을 내고 환상적인 선수단을 보유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 승부 조작, 인종 차별, 텅 빈 경기장… 명장 '엑소더스'
이탈리아 축구계의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승부 조작 역시 이탈리아 축구계를 병들게 했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지난 2006년 대규모 승부조작 스캔들 '칼치오폴리'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명문 유벤투스도 2부 리그 강등을 피하지 못했다.
이 외에도 인종 차별, 팬 폭력 사태, 낙후된 경기장 시절, 텅 빈 경기장 등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산적해 있다. 지난 2013년 1월 AC 밀란에서 활약하던 케빈 프린스 보아텡이 극심한 인종 차별 구호에 경기장을 빠져나간 것이 대표적인 예다.
간디니 대표이사 역시 "우리는 똑같은 문제에 대해 같은 대화를 반복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USA투데이는 이런 문제들이 선수 유출에 이어 이탈리아 출신 감독 '엑소더스'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가 대표적인 행선지다. 다음 시즌 프리미어리그에 나서는 20개 팀 중 4개 구단이 이탈리아 감독을 선임했다.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은 레스터시티 우승을 이끌었으며 현재 이탈리아 대표팀 수장 안토니오 콘테는 올 여름 첼시 감독에 부임한다. 왈테르 마자리(왓포드), 프란체스코 귀돌린(스완지시티)도 잉글랜드 무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밖에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장 카를로 안첼로티는 다음 시즌부터 바이에른 뮌헨(독일)을 지휘한다.
반면 AC 밀란은 지난 2년 동안 사령탑을 5번이나 교체했다. 더구나 이들 중엔 필리포 인자기, 클라렌세 시도르프 등 '초짜' 감독도 더러 포함돼 있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문팀 답지 않은 행보다.
이탈리아 축구계는 언제쯤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간디니 대표이사는 "이탈리아 축구는 5~6년은 지나야 조금씩 변화할 것"이란 말과 함께 인터뷰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