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은 19일 서울 등촌동 사옥에서 재정위원회를 개최했다. 이번 재정위원회는 여자농구계를 웃음거리로 만든 첼시 리(27)의 혈통사기극과 관련해 WKBL의 책임을 묻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지난 5일 열린 이사회에서 첼시 리 사태에 대한 후속 대책과 징계를 내놨지만 소속 구단인 KEB하나은행에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정작 연맹은 책임을 회피했다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신선우(60) WKBL 총재는 "연맹의 책임에 대해서 논의했으나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다음주에 재정위원회를 개최해서 논의하겠다"는 말로 'WKBL 책임론'을 피해갔다.
하지만 신 총재의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다음 주 재정위원회를 개최하겠다"던 얘기는 지난 주 충남 아산에서 열린 '박신자컵 서머리그' 일정을 이유로 뒤로 밀렸다. "첼시 리 사태에 대한 연맹의 책임에 대해 논의하겠다"고 했지만 이번에도 뚜렷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첼시 리 사태가 불거진 6월 초부터 지금까지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있었지만, WKBL은 자기반성 없이 눈과 귀를 막고 버티는 모습이다.
◇무엇을 위한 재정위원회였나 19일 열린 재정위원회에는 최경덕 위원장과 이병진, 조성원, 이해욱 변호사 등 위원 3명을 포함해 총 4명이 참석했다. 강현숙 위원과 손대범 위원이 불참했지만 전체 6명 중 3분의 2인 4명이 참석하면 재정위원회를 개최할 수 있다는 조건을 충족해 오전 11시부터 약 1시간 30분 가량 회의가 진행됐다.
하지만 재정위원회에서 WKBL의 책임 소재를 묻고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권한이 없는 기구였기 때문이다.
이날 회의를 마치고 나온 최 위원장은 "재정위원회는 WKBL을 제재할 권한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최 위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재정위원회는 "특정 안건에 대해 의견을 조율·보고하는 총재의 자문기구"일 뿐이었다. 지난 이사회에서 "재정위원회를 개최해 연맹의 책임에 대해 논의하겠다"던 신 총재의 얘기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실제로 WKBL 규정은 재정위원회에 대해 '구단과 구단 임직원, 감독, 코치, 선수, 심판 등 WKBL을 구성하는 단체 또는 개인간 제반 분쟁을 해결하고 상벌사항을 심의하기 위한 총재의 자문기구'라고 명시하고 있다. 재정위원회에 신청할 수 있는 내용은 ▲선수계약에 관한 구단과 선수간의 분쟁 ▲선수 이적에 관한 구단 간 또는 구단과 선수간의 분쟁 ▲WKBL 정관, 규약 기타 제규정 상의 권리, 의무에 관한 분쟁 등이며, WKBL 자체 징계를 위해서는 총회를 통해 구단주들의 의견을 모아야 한다. 하지만 신 총재는 "재정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했을 뿐이다.
결국 이날 열린 재정위원회는 첼시 리 사태에 대한 WKBL의 책임론에 아무런 대답도 주지 못했다. 최 위원장은 "첼시 리 사태에 대한 안건을 논의한 뒤 신 총재에게 의견을 전달했다"고 설명했지만 대체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재정위원회에서 논의한 사안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다"는 이유였다.
◇무엇을 위한 버티기였나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신 총재가 언급했던 재정위원회는 유명무실하게 끝났고, "언제까지 이 부분에 대해 결론을 내겠다"는 최소한의 약속도 없었다. 결코 발빠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5일 이사회에서 첼시 리와 소속팀 KEB하나은행에 중징계를 내린 것과 명백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WKBL은 당시 이사회에서 첼시 리에게 영구제명 및 지난 시즌 기록·시상 취소 징계를, 소속팀 KEB하나은행에는 정규리그 2위 및 준우승 성적 말소 및 시상금 총 4500만원(플레이오프 3000만원·정규리그 1500만원) 환수, 드래프트 최하위 순번 부여 등의 징계를 내렸다. 출생증명서 등을 위조해 첼시 리를 KEB하나은행에 입단시킨 에이전트 2명은 무기한 활동 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선수와 구단에만 책임을 묻고 첼시 리의 입단을 허락한 WKBL은 스스로 아무 책임도 묻지 않았다. 언론과 팬들의 비난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꿋꿋이 '버티기'로 일관했다. 이사회에서 재정위원회로 책임 논의를 미루더니 정작 재정위원회에서는 '권한이 없다'며 모르쇠로 나올 뿐이다. WKBL이 첼시 리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현재로서는 WKBL 측도 이번 사태의 결론이 어떻게 날 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다. 기본적으로 연맹 책임 등에 대한 모든 조치가 총재의 권한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사태에 앞장 서서 해명해야 할 신 총재는 자신이 약속한 말도 지키지 않는 무책임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초유의 사기극에 놀아나고도, WKBL의 수장으로서 사태의 심각성을 통감하기는 커녕 책임 회피에 급급한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첼시 리 사태 이후 벌써 한 달여가 지났다. 책임을 지거나 혹은 책임이 없다는 해명을 내놓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흐른 셈이다. 하지만 '골든타임'을 놓친 이상, 남은 것은 WKBL이 제대로 된 자기반성 없이 유야무야 마무리짓고 시즌에 돌입하는 일만 없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