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첫 날, 밀워키 브루어스 소속이던 그는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트레이드됐다. 상대는 왼손 거포 아담 린드였다. 그는 좀처럼 하지 않던 일을 하기로 했다. 인터넷 기사와 댓글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데려간 토론토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야기를 읽다 말고 전의를 불태웠다.
2008년, 카일 헨드릭스도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6월의 드래프트에서 LA 에인절스가 그를 지명했다. 문제는 그가 39라운드에서 뽑혔다는 것이었다. 카피스트라노밸리 고교 3학년이던 헨드릭스의 구속은 겨우 시속 80마일(128km)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고민 끝에 그는 아이비리그 명문 다트머스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몇 년 뒤를 기약하면서.
2006년을 기점으로 메이저리그는 한동안 투고타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투수들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시속 93마일(153km)을 넘어섰다. 뉴욕 메츠 에이스 노아 신더가드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시속 98마일(158km)에 달한다.
그러나 에스트라다와 헨드릭스는 강속구 시대를 거스르고 있다. 두 명 모두 빠른 공의 평균 구속이 시속 90마일에 미치지 않는다. 에스트라다의 주무기는 시속 89마일(143km/h) 포심 패스트볼이다. 헨드릭스의 주무기는 시속 88마일(142km/h) 싱커다. 규정이닝을 채운 선발투수 중에서는 구속이 한참 밑바닥에 있다. 메이저리그 평균 구속 순위에서 에스트라다의 이름 밑에 있는 5명 중 2명은 너클볼 투수다.
그럼에도 둘은 나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에스트라다는 지난해 34번 등판해(28선발) 181이닝 동안 평균자책점 3.13을 기록했다. 후반기 팀 선발진 중에서 3번째로 평균자책점이 좋았다. 이를 바탕으로 토론토와 2년 연장 계약에 합의했다. 올해도 151⅔이닝을 던지며 8승 8패 평균자책점 3.68을 기록 중이다.
헨드릭스는 더 극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다. 올시즌 165이닝동안 14승 7패 평균자책점 2.07을 기록했다. 내셔널리그 평균자책점 단독 선두다. 시속 89마일 싱커의 헨드릭스가 시속 100마일 싱커를 던지는 노아 신더가드와 사이영상 경쟁을 펼치고 있다. 2년 전 처음 등장했을 때 잘해야 3~4선발급으로 여겨지던 것을 생각하면 상전벽해다.
둘의 성공은 구속에 매달리지 않은 철저한 자기 분석 덕이었다. 에스트라다와 헨드릭스는 모두 느린 공을 가진 투수다. 하지만 탁월한 체인지업을 바탕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고 있다. 더불어 에스트라다는 ‘라이징 패스트볼’로 배트의 위를, 헨드릭스는 ‘싱커’로 배트의 아래로 공을 비껴가고 있다.
에스트라다는 지면에 수직에 가깝게 팔을 들어올려 공을 던진다. 이때 걸리는 회전이 만들어낸 공기 저항이 공을 ‘덜 떨어지게’ 만든다. 마치 공이 솟구치는 듯한 착시효과가 일어나고, ‘라이징 패스트볼’이 탄생한다.
에스트라다의 패스트볼은 분당 2404회 회전한다. 리그 평균인 2264회, 클레이튼 커쇼의 2278회보다도 더 높다. 타자가 낮은 볼이라고 인식한 순간, 솟구치는 듯한 움직임 때문에 공은 스트라이크 존의 아래쪽에 걸쳐 들어온다.
‘솟구치는 공’에 나간 배트는 공의 밑동을 때리기 십상이다. 그 결과 플라이볼이 양산됐다. 에스트라다가 허용한 타구 중 플라이볼 비율은 리그 최고 수준인 46.7%다. 힘없이 솟구친 플라이볼이 수비수가 가장 잡기 쉬운 공이라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에스트라다는 최고 수준의 체인지업까지 보유했다. 체인지업의 피안타율은 리그 평균인 0.241보다 훨씬 낮은 0.162에 불과하다. ‘솟구치는’ 패스트볼과 ‘느리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의 조합은 에스트라다를 컨택트의 마술사로 만들었다. 에스트라다의 공을 쳤을 때 인플레이가 된 타구의 타율(BABIP)은 0.232에 불과하다. 리그에서 2번째로 좋은 성적이다.
에스트라다가 ‘라이징 패스트볼’로 타자의 방망이 위쪽을 공략한다면, 헨드릭스는 반대로 ‘떨어지는 공’으로 방망이 아래를 공략한다. 헨드릭스의 주무기 싱커는 아래로 떨어지는 빠른 패스트볼이다. 두번째 무기인 체인지업 역시 마찬가지다. 헨드릭스는 아래로 떨어지는 공을 스트라이크 존 아래로 무자비하게 꽂아 넣는다. 투수의 교과서와도 같은 표어인 ‘낮게 더 낮게’를 실천한 전술이다.
헨드릭스의 싱커와 체인지업 구속은 시속 8마일(12km/h) 차이가 난다. 그러나 두 구종의 회전수는 분당 1966회와 2111회로 상당히 비슷하다. 두 공의 회전축도 거의 같다. 타자 입장에서는 비슷한 회전을 가진 공이 다른 빠르기와 다른 낙차를 가지고 들어온다. 육안으로 구별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싱커 타이밍에 배트를 냈는데 한 박자 늦게, 그보다 더 낙차가 큰 체인지업이 들어오는 당혹스러운 경험이 계속된다.
설령 배트에 맞아도 떨어지는 공에는 정타가 나오긴 힘들다. 그 결과 헨드릭스가 허용한 타구에는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타자의 눈과 타이밍을 흐트러트리고 제구에 집중하니 주자를 내보내는 일 자체도 적어졌다. 헨드릭스의 WHIP(이닝당 출루 허용률)는 0.92로 메이저리그 2위에 올라 있다. 1위는 사이영상 수상 경력이 있는 워싱턴의 맥스 슈어져다.
그들의 2014년, 2008년은 그 느린 공만큼이나 암울하고 천천히 지나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느린 공을 던지는 그들에겐 누구보다도 찬란한 후일담이 기다리고 있었다.
트레이드 날 ‘모두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겠다’고 마음먹은 에스트라다는, 1년 뒤 1승 3패로 내몰린 팀의 가을 야구 명운을 짊어지고 챔피언십 시리즈 5차전에 등판했다. 전날 14득점 맹폭을 가한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방망이는 연신 허공을 갈랐다. 8회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그를 팬들은 비난이 아닌 환호성으로 맞이했다.
아이비리그 명문 다트머스에 진학한 헨드릭스는 3년 뒤 8라운드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그로부터 5년 뒤, 헨드릭스는 내셔널리그 평균자책점 1위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이제 팬들은 그를 ‘교수’라 부른다. 그의 시카고 컵스 선배,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투수 ‘마스터’ 그렉 매덕스에게 붙었던 바로 그 별명이다.
박기태(야구공작소)
야구 콘텐트, 리서치, 담론을 나누러 모인 사람들. 야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공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