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투른 발음이었지만 분명히 한국어였다. '친구'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입에 올린 고다이라 나오(31·일본)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연신 강조했다. 고다이라는 이상화(28·스포츠토토)를 제치고 세계선수권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에게 이상화는 여전히 '목표'이자 '세계 최강'이었다.
지난 9일부터 12일까지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2017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스피드스케이팅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는 2018 평창겨울올림픽 테스트 이벤트를 겸해 치러졌다. 올림픽 리허설과 같은 무대였기 때문에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앞다퉈 참가해 화제가 됐다.
그중에서도 올 시즌 월드컵 시리즈 전 대회 금메달로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고다이라는 이번 대회에서 여자 500m 금메달·1000m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빙속 팬들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었다.
고다이라가 펼친 가장 인상적인 경기는 역시 대회 둘째 날 여자 500m다. 이 종목 최강자는 단연 이상화. 하지만 무릎과 정강이 부상 여파로 인해 올 시즌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월드컵 1~4차 대회에서 은메달 두 개, 동메달 한 개에 그쳤고, 2009~2010시즌 이후 7년 만에 '노 골드'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월드컵 5, 6차 대회까지 포기하면서 이번 세계선수권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결과는 은메달로 끝났다.
물론 시즌 내내 부상 때문에 제대로 된 레이스를 펼치지 못했던 터라 이상화 본인도 썩 실망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록에 만족한다. 더 중요한 대회가 있으니 평창겨울올림픽에 집중하겠다"고 다부진 각오를 밝혔다.
이 대회에서 이상화 대신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가 바로 고다이라다.
이상화보다 한 조 앞선 10조에서 경기를 펼친 고다이라는 자신의 상승세를 증명하듯 10초31의 빠른 스타트로 100m 랩타임을 끊었고, 역주를 펼치며 37초13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자신의 개인 최고 기록이자 일본 신기록이었다. 일본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 월드 챔피언에 등극하는 기쁨도 함께 안았다.
경기가 끝난 뒤 고다이라는 취재진에게 둘러싸여 기쁨을 만끽했다. 일본 취재진은 새 역사를 쓴 자국의 챔피언에게 30분 넘게 질문을 쏟아부었고, 기자회견 뒤에는 한국 취재진도 '이상화를 꺾은' 고다이라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마치 고다이라가 혜성같이 등장한 것처럼 보였고, 이상화의 '라이벌'로 공인받는 듯한 분위기였다.
사실 올해로 31세인 고다이라에게 혜성같이 등장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중·상위권을 맴돌던 그가 최근 1~2년 사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평창겨울올림픽이 임박한 만큼 이상화의 올림픽 3연패를 위협할 라이벌로 불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정작 고다이라는 '라이벌'이라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지난 10일 500m 경기를 마친 뒤 믹스트존에서 만난 고다이라는 "상화와 라이벌로 불리기에 나는 아직 약하다"고 단언했다. 이어 "상화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스케이터다. 라이벌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아직 부족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세계선수권 우승을 차지한 직후임에도 한없이 겸손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고다이라의 대답은 틀에 박힌 '예의'나 '매너'는 아니었다.
고다이라는 2014 소치겨울올림픽이 끝난 뒤 선수로서 발전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결심은 굳힌 그는 이를 빠르게 행동으로 옮겼다. 스케이트 강국으로 불리는 네덜란드로 자비 유학을 떠나 1998 나가노겨울올림픽·2006 토리노겨울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인 마리안느 티머, 지아니 로메 등에게 배우며 2년간 스케이트를 탔다.
"그때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자신감 넘치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정신력"이라고 돌이킨 고다이라는 웃음과 함께 "상화는 이미 일찌감치 그 정신력을 갖춘 선수"라고 치켜세웠다. 자타가 공인하는 '이상화의 강인한 정신력'은 고다이라가 그를 높이 평가하며 목표로 삼고 있는 이유다. 고다이라는 "상화는 나보다 어리지만 스케이트를 대하는 태도가 진지하고, 정신력도 강한 친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월드컵 시리즈와 세계선수권대회, 그리고 올림픽에서 수도 없이 얼굴을 맞댄 두 사람은 경쟁 관계에도 불구하고 만나면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친구' 사이다.
이날도 두 사람은 나란히 시상대에 서서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눴다. 물론 경기가 시작되면 둘은 친구에서 경쟁자로 변한다. 이번 대회처럼 앞으로 다가올 삿포로 겨울아시안게임과 평창겨울올림픽에서도 둘은 한 치의 양보 없는 승부를 펼쳐야 한다.
"언제나 상화를 목표로 노력해 왔다. 상화와 친구지만 승부는 승부"라고 잘라 말한 고다이라는 "이번 경기에서 내 기록을 스스로 넘어선 게 가장 기쁘지만 여전히 내 목표는 상화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스케이터인 상화를 목표로 계속 스케이트를 타고 싶다"고 도전 의식을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