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 안 좋지… 원래 자원도 많지 않은데, 최근 몇 년 간 체력까지 완전 저질됐잖아. 미국과 중국에서 흔들어대는데, 대선판에서는…, 완전 '노답'이야."
얼마 전 술자리에서 만난 정책 전문가는 암울한 한국 경제를 비관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썰렁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나는 야구로 주제를 돌려봤다.
오늘날 한국 경제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야구팀이 있었다. 1993년부터 2012년까지 패배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였다. 뒷심 부족으로 2011년과 2012년 연달아 시즌 후반부에 무너지며 20 년 연속 루징(승률 0.500 이하) 시즌을 기록한 파이어리츠는 재정난으로 재기는 고사하고 재건의 가능성조차 없어 보이는 팀이었다.
2012년말 피츠버그의 닐 헌팅턴 단장과 클린트 허들 감독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그들이 다음 시즌 FA(자유계약선수)에 쓸 수 있는 재원은 고작 1500만 달러였다. 중상급 빅리거 두 명도 구할 수 없는 ‘껌값’이었다. 드래프트에 의존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신인들은 최소 몇 년의 숙성기간이 필요해 2013년 전력에 기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마이너리그에서 데려와 투입할 수 있는 유망주들 역시 변변치 않았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팀 전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파이어리츠는 2012년 로스터의 90%를 그대로 2013년에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린 파이어리츠 사령탑은 결국 기존 수비력을 향상시키는 방안을 모색했다. 선수들의 DRS(Defense Runs Saved·수비실점방어력)를 올릴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묘수를 찾아야 했다. 수비는 마운드에서 시작한다. 사령탑은 일단 메이저리그 투수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2008년부터 메이저리그 전 구장에 도입된 모션트래킹 기술인 PITCH f/x는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포수에게 전달되는 전 과정의 투구 속도, 궤적, 위치를 3차원 이미지로 세밀하게 나눠 실시간으로 재생해냈다. 초창기에 주로 주심 판정과 투수를 평가하는 데 사용된 PITCH f/x 데이터에 파이어리츠 분석팀은 흥미로운 기록을 접목했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 메이저리그의 타구 기록에 의하면 타자들은 땅볼의 73%를, 라인드라이브의 55%를 그리고 플라이볼의 40%를 당겨쳤다. 분석팀은 이 원천 자료를 토대로 각 타구 분류에 해당되는 투구 유형의 상관관계를 찾아냈다. 그리고 얼마 후 분석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사령탑에게 보고했다.
‘파이어리츠가 수비 시프트를 과감하게 추진한다면 DRS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파이어리츠가 PITCH f/x 데이터를 통해 얻은 수확은 또 있었다. 분석팀은 포수의 ‘숨겨진 가치’인 피치프레이밍(Pitch-Framing)에 주목했다. 경계선에 있는 공을 볼이 아닌 스트라이크로 만들어내는 포수의 미묘한 재능은 팀 전체의 DRS를 높였다. 피츠버그는 뉴욕 양키스 포수 러셀 마틴을 영입했다. 전해 타율 0.211인 '퇴물'을 2년 1700만 달러에 계약하며 파이어리츠 여유자금 반 이상을 써버리자 언론과 팬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객관적으로 보면 도발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2012년 시즌에 마틴의 피치프레이밍이 양키스에게 23점의 득점 저지를 가져다 줬다고 파악한 사령탑은 확신했다. 마틴이 2013 년 파이어리츠의 ‘초석’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도박에 가까운 실험으로 2013년 시즌을 돌파할 계획을 굳힌 사령탑은 투심 패스트볼에 능숙한 투수들을 줄줄이 영입했고, 기존 투수진에게도 인사이드 피치와 땅볼 유도형 투구를 훈련시켰다. 인사이드 피치는 단순히 당겨치는 타구를 유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심리적으로 위축된 타자들은 몸쪽 공 직후에 나온 바깥쪽 공을 칠 때에도 땅볼을 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구단의 문화 역시 달라져야 했다. 사령탑은 선수와 ‘비선수’ 간의 벽을 완전히 허물고 원활한 소통과 협업을 주문했다. 수비 시프트라는 ‘새로운 야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구단의 모든 구성원들은 서로 각 분야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신뢰해야했다. 평생 프로야구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샌님들이 만들어낸 파격적인 전략을 고액 연봉을 받는 자부심 강한 야구선수들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는 계량화된 수학공식이나 모델에 당연히 익숙치 않았고, 필드에서 플레이로 보여지지 않는 가상 작전을 납득하지 못했다. 즉 보이지 않는 개념을 믿게 하는 게 프런트의 숙제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 이들을 믿게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보여주는 것이었다. 분석팀은 선수들을 (가르치지 않고) 설득하기 위해 그래픽 시뮬레이션을 만들어 보여줬다. 시각인지력이 뛰어난 야구선수들에게는 숫자와 개념보다는 영상 정보가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분석팀은 다양한 작전 가안들을 코칭스태프와 논의해 실전 경험에서 나온 아이디어와 노하우를 첨부했다. 그렇게 수정을 거듭해 보완된 수비 시프트 모델은 현역 선수들의 훈련에서 응용하며 조율했다. 파이어리츠의 수비 시프트는 그렇게 총체적인 노력으로 완성됐다.
야구 역사상 수비 시프트를 시도한 팀이 파이어리츠가 처음은 아니었다. 20 세기초부터 ‘윌리엄스 시프트’로 불리며 사용된 변형 수비는 야구사학자들에 의하면 19세기 말에도 쓰인 적이 있다고 한다. 2013년 피츠버그 이전에 시프트의 중요성을 인식한 팀들은 있었다. 2013년에도 다섯 개 팀이 피츠버그보다 많은 시프트를 시도했다. 하지만 피츠버그는 경기 상황에 맞는 ‘전술’이 아닌, 팀 변화의 핵심 ‘전략’으로 매 경기마다 포수와 투수의 지휘하에 수비 시프트를 체계적으로 구사한 팀이라는 게 중요하다.
파이어리츠의 혁신은 대성공이었다. 2013년에서 2015년까지 파이어리츠 상대팀의 인플레이 타구가 땅볼로 이어진 확률은 64.3%였다. 같은 기간 메이저리그 평균은 59%였다. 논란 속에 영입됐던 포수 마틴은 2013년 WAR(대체선수대비승리기여) 4.1 을 기록했고, 수비 시프트를 조정하는 역할 역시 안정적으로 수행했다. 2013년 시즌에서 5명의 올스타, 내셔널리그 MVP 와 ‘올해의 감독’까지 배출한 파이어리츠는 94승 68패로 플레이오프에 안착했다. 그 기세를 몰아 피츠버그는 2014년과 2015년에도 포스트시즌에 연달아 진출했다. 적극적인 수비 시프트는 이제 메이저리그와 세이버매트릭스의 최대 화두가 됐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듯 야구도 진화한다. 타율과 평균자책점 같은 전통적인 기록과 진단은 오늘날 큰 의미가 없다. 야구를 오래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실이 있다. 그 어떤 팀도 다른 팀과 유사하지 않다는 것이다. 각 팀은 각자의 고유한 문제를 자신만의 해법으로 풀어야 한다. 2013년 파이어리츠는 '얼리 어댑터'였다. 기존 체제가 몰랐던 기회를 포착해 적절하게 활용했다.
절박한 위기상황과 악조건 속에서도 ‘파이어리츠식’ 수비 시프트를 창조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이 만들어낸 그들만의 체화된 방식이었다. 야구를 분석하는 관점이 달라지면 경기를 운영하는 방식 역시 달라진다. 새로운 관점은 늘어진 관성이 아닌 주의 깊은 관찰에서 나온다. 기존에 없던 데이터를 채굴해 신기술과 창의적으로 융합하면 흔히 말하는 혁신이 이뤄지고, 사소한 발견에서 얻은 통찰력이 어려운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신선하게 해석하는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다르게 생각해야 다르게 보인다. 다른 길이 없다면 새 길을 만들어야 한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한국 경제가 지금 필요한 것은 ‘마인드 시프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