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월 31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 홈팀 삼성과 원정팀 KIA의 시즌 개막전이 열렸다. 삼성 2번 타자 김헌곤(29)이 1회말 무사 1루에서 타석에 섰다. 벤치에서 희생번트 사인이 나오자 초구에 성공시켰다. 보통 희생번트를 댄 선수는 욕심내지 않고 1루로 달린다. 하지만 김헌곤은 1루가 가까워지자 왼쪽 다리를 구부리며 벤트 레그 슬라이딩을 했다. 결과는 아웃.
#2. 4월 2일 삼성-KIA전. 김헌곤은 팀이 4-1로 앞선 4회말 1사 2루에서 유격수 쪽으로 안타성 타구를 때려 냈다. 그러나 KIA 유격수 김선빈이 다이빙캐치로 잘 잡아내 1루로 공을 던졌다. 김헌곤은 이번엔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세이프가 됐다.
김헌곤이 개막 3연전에서 보여 준 두 차례 슬라이딩은 그의 절박함과 근성을 잘 보여 준다.
2011년 삼성 5라운드 36순위로 입단한 외야수 김헌곤은 소문난 연습 벌레다. 경산의 2군 숙소에서 1군에서 내려온 투수 장원삼이 "또 옥상에 배트 돌리러 가나"라고 했을 정도다. 2011~2013년엔 1군 33경기에만 출전했다. '무명' 김헌곤은 2군 훈련을 마친 뒤 매일 밤늦게까지 배트를 돌렸다. 지나친 훈련은 독이 됐다. 너무 많은 스윙으로 손목 부상이 찾아오기도 했다.
2014년엔 주로 교체 요원으로 124경기에 뛰었다. 이듬해 상무에 입대했고, 2016년엔 타율 0.378(254타수 96안타)로 퓨처스리그 타격왕을 차지했다. 김한수 삼성 감독은 최형우(KIA)의 이적 공백을 메울 첫 번째 후보로 김헌곤을 떠올렸다.
김헌곤은 31일 개막전에 2번·좌익수로 출장했다. 개인 첫 개막전 선발 출장. 1회 벤트 레그 슬라이딩으로 근성을 보여 준 김헌곤은 1-2로 뒤진 6회 1사 1루에서 구자욱의 2루타 때 홈을 파고들다 아웃됐다. 접전 상황이었는데 이번에는 슬라이딩을 하지 않았다. 상대 포수가 바깥쪽으로 빠져 있어 세이프 타이밍으로 생각했고, 때로는 슬라이딩을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나을 수도 있다고 판단해서다.
하지만 삼성은 동점에 실패했고 결국 2-7로 졌다. 김헌곤은 경기 뒤 TV 중계 화면을 보며 또 한 번 자책했다. '그때 슬라이딩을 하고, 홈에서 세이프가 됐다면 결과가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김헌곤은 "나는 부담감을 잘 느끼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주변에선 그렇게 보지 않더라. 나도 모르게 쫓기는 게 있었던 것 같다. 불필요한 중압감을 가졌다"고 털어놨다. "'잘해야겠다'고 다짐한다고 잘하는 게 아닌데, 아직은 많이 경험해야 할 것 같다"고 반성했다.
김헌곤은 2일 경기서 부담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1-0으로 아슬하게 앞선 2회 쐐기 3점홈런을 터뜨렸다. 그의 개인 통산 네 번째 홈런이다. 베이스를 돌며 두 차례나 주먹을 불끈 쥘 만큼 환호했고, 기뻤다. 이어 4회 내야안타 때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했고, 8회 2루타를 때려 냈다. 김헌곤의 5타수 3안타 3타점 3득점 활약 속에 사령탑 데뷔 첫 승을 올린 김 감독은 "김헌곤의 집중력이 돋보였다"고 칭찬했다. 김헌곤은 일그러진 표정이 트레이드마크다. 1루까지 전력 질주한다. 2014년 넥센과 한국시리즈(KS) 5차전, 최형우의 2루타 때 끝내기 득점을 올린 장면이 대표적이다. 10초 남짓 짧은 시간 앞만 보고 달렸다. 최형우의 KS 역대 열 번째 끝내기 안타는 대주자 김헌곤의 발 덕분에 빛날 수 있었다. 김헌곤은 당시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홈에 들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슬라이딩 도중 허리 벨트가 끊어진 적도 있다. 몸을 사리지 않고 허슬 플레이를 하다 보니 주변에서 만류할 정도다.
그런 선수를 바라보는 사령탑도 흐뭇하다. 김 감독은 '열심히' 하는 선수를 좋아한다. 지휘봉을 잡고 처음 나선 일본 오키나와 마무리캠프에서 김헌곤을 MVP로 선정하며 "구자욱과 같은 케이스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자욱은 상무 시절인 2014년 퓨처스 남부리그 타격왕(0.357)에 오른 뒤 2015년 신인왕을 차지했다. 지난해는 타율 0.343으로 삼성의 간판타자로 자리 잡았다.
김헌곤의 목표는 소박하다. "손목 통증과 수술로 2년간 아팠다. 지금은 통증 없이 야구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 야구장에서 건강하게 뛰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입단 초기 부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몸을 던진다. 그는 개막 3연전 뒤 두 차례의 슬라이딩을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본능적으로 슬라이딩을 했다. 나도 모르게 '파이팅 있게 한 번 불살라 보자'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는 한마디, 그리고 경기장에서의 플레이에 그의 절박함과 프로 근성이 모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