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포츠의 백년대계를 책임질 진천선수촌이 시작하기도 전에 크고 작은 난제로 애를 먹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시설과 규모를 자랑하지만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에는 예산 확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와 함께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 사건 이후 교육부의 체육특기자의 대학 출석 규정이 강화되면서 학생 국가대표 선수들의 등하교 문제도 새로운 고민거리로 떠올랐다. 선수촌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이재근(67) 태릉선수촌장은 "진천 이전은 단순히 선수촌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백년을 설계하는 대한민국 체육사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일"이라며 "원래 일 못하는 조직이 예산타령, 인력타령 한다지만 실제 선수촌의 당면 현안 사항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를 충족할 수 있는 예산과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부족한 예산과 '제자리걸음' 지도자 처우
태릉선수촌은 오는 10월을 끝으로 100여년의 역사를 마감한다.
한국 스포츠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태릉은 이제 선수촌의 기능을 멈추고 근대문화유산과 관광지로 보존 관리될 예정이다. 그동안 이곳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구슬땀을 흘려왔던 선수들은 오는 9월 말 준공되는 진천선수촌으로 전원 이전한다. 10월부터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향한 본격적인 담금질을 시작할 예정이다.
진천선수촌은 세계 굴지의 국가대표 선수촌과 비교해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종합훈련 선수촌으로서 종목별 전용 훈련이 가능하다. 선진국형 최첨단 스포츠훈련 환경 기반시설이 갖춰져 있어 순환 훈련체례 구축은 물론 경기력 향상을 극대화 할 것으로 평가된다.
규모와 수용인원, 수용종목 면에서 기존 태릉선수촌을 압도한다. 수용인원이 기존 450여명에서 1150명으로, 수용 종목도 12개에서 35개 종목으로 대폭 확대됐다. 훈련 시설 역시 12개소에 18개로 증가하며 숙소도 3개동 358실에서 8개동 823실(1인실 500개·2인실 323개)로 늘어난다. 대한체육회측은 "총 사업비만 5130억원이 투입된 대규모 프로젝트로서 시설규모와 수용인원이 태릉보다 평균 3배 가량 확대됐다.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한 각종 장비도 함께 늘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예산이다. 이런 대규모 시설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예산 확보가 시급하다. 이 선수촌장은 "태릉선수촌은 연간 1000억원의 예산을 쓴다. 이중 사업비가 85% 나머지는 운영비"라며 "진천으로 이전할 경우 운영비만 최소 200억원이 더 들어간다"고 한숨을 쉬었다.
감독과 코치 등 지도자의 낙후된 처우도 해결해야 한다. 태릉선수촌 내 대표팀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최근 3년 동안 임금이 동결된 상태다. 이들은 대다수가 1년 단위 계약직으로 이마저도 11개월씩만 연봉 계약을 맺고있는 상황이다. 1년 중 한 달은 월급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당장 내년 계약 여부도 알 수 없다. 고용이 불안정한 만큼 최소 물가인상분 만큼은 월급을 올려 줘야 하는 상황.
그러나 예산이 부족하다. 태릉에 입촌한 지도자들은 사실상 24시간 근무한다고 봐야 한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일반 직장인과 비슷하게 연봉이 책정되고, 수년째 동결상태이면 현장 사기가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표팀의 경기력 향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서 다양한 선진기술 습득을 위한 해외 전지훈련도 강화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정유라 후폭풍 맞은 학교 출석도 발목
태릉선수촌에 모인 대표팀 선수 중 상당수는 한국체육대학교 등 수도권 대학에 재학중이다. 태릉에서 훈련을 할 때는 학교 출석과 등하교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서울과 80㎞ 가량 떨어진 진천으로 이전할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표팀 훈련과 동시에 하루 왕복 3시간 이상을 쏟아부으면서 학점을 이수하기 힘들다.
사실 몇 년 전만해도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 훈련에 차출되거나 국제대회에 출전해 성적을 낼 경우에는 출석 일수가 부족해도 학점을 인정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정유라의 이화여대 체육 특기자 입시 부정 문제가 불거지면서 학교들의 체육특기자 학사관리가 엄격해졌다.
이 선수촌장은 "대표팀 선수들의 학사관리를 위해서 여러 대책을 강구중이다. 가령 훈련이나 국제대회로 수업에 빠질 때에는 다른 기간에 별도의 공간에서 공부를 하는 식이다. 진천선수촌 내 강의실에서 교수를 초청해 수업을 하거나 영상으로 과목을 이수할 수도 있다"면서도 "하지만 이렇게 간주하는 것 자체가 교육법에 맞지 않는 실정이다. 현재 국가대표 선수의 학습권에 대해 법적 제도적 정비를 요구중에 있다"고 설명했다. 교육부와 문화체육관광부, 현장까지 여러 관계자가 머리를 맞대야만 해결이 가능하지만 최근 사회 분위기가 녹록하지 않다.
진천으로 이사를 가면서 훈련파트너나 트레이너를 고용하는데도 애를 먹고 있다. 입촌 선수들이 기존에 3배 이상 늘어남에 따라 효율적인 훈련을 도와줄 이들이 함께 따라와야 하지만 수도권이 아닌 지방 근무라 쉽지 않다. 복싱과 레슬링, 유도 등 트레이너와 파트너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종목은 더욱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체육회의 한 관계자는 "태릉에서는 인근 용인대 등지에서 바로 수급이 가능했다. 트레이너직군에 많은 젊은이들이 지방 근무를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설령 이들이 오더라도 잘 곳을 마련해 줘야 하는데 예산이 발목을 잡는다"고 귀띔했다.
진천선수촌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종합 4위·총 메달 20개(금8개, 은4개, 동8개)를 목표로 나아간다. 이는 새롭게 탄생한 선수촌이 제 구실을 할 때 달성할 수 있는 성적이다.
이 선수촌장은 "기획재정부가 약 5000억원 가량이 투입된 진천선수촌을 직접 둘러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규모를 크게 확장하고 운영비가 부족해 장비를 설치하지 못하거나, 제 기능을 하지 않으면 되겠나. 무엇이든 현장에 문제가 있고 또 답이 있는데 이를 문화체육관광부와 기획재정부 같은 정부부처가 이해해 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