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각 구단과 선수들에게는 '천적'만큼 무시무시한 단어가 없다.
만날 때마다 이상하게 경기가 잘 안 풀리고, 결국에는 끝내 패하고 마는 상대가 바로 천적이다. 객관적 전력에 따라 좌우되는 것만도 아니다. 뚜렷한 이유도 없다. 지난해 하위권으로 처졌던 롯데는 정규시즌 우승팀 두산을 상대로 유일하게 8승8패로 밀리지 않았던 구단이다.
롯데는 지난해 NC 탓에 한 해 농사를 망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NC전 성적이 1승15패. 역사에 남을 만한 천적 관계였다. 특정 팀을 상대로 한 시즌 승률 1할을 넘지 못한 사례는 이전에 총 다섯 번 나왔다. 프로야구 출범 원년의 삼미가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팀이던 두산의 전신 OB를 상대로 16전 전패를 당했다. 역대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한 전패 기록이다.
상대 전적 1승에 그친 구단도 네 팀 있었다. 1986년 청보가 삼성전 1승17패, 1993년 태평양이 해태전 1승17패를 각각 기록했다. 1999년에는 쌍방울이 두산에 1승16패(1무), 2003년에는 롯데가 KIA에 1승17패(1무)로 각각 밀리면서 바닥을 쳤다.
지난해 롯데도 그랬다. NC전 성적만 삭제해도 승률 5할을 넘는다. NC전에서 반타작만 했어도 5강을 노릴 수 있었다. 그런 롯데가 올해 개막전 상대로 맞이한 팀 역시 얄궂게도 NC. 게다가 장소는 마산구장이었다. 첫 경기에선 운이 따르지 않았다. 접전 끝에 패해 마산구장 16연패를 이어갔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달라진 롯데'의 모습이 나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빅 보이' 이대호와 군 입대를 마치고 복귀한 전준우의 불방망이를 앞세워 3연전의 남은 두 경기를 모두 이겼다. 롯데의 반등을 예고하는 개막 3연전이었다.
단독 선두를 질주하고 있는 KIA의 돌풍도 천적 관계 청산에서 시작됐다. KIA는 지난해 5강에 들었지만, 두산과 넥센을 만나면 고전했다. 두 팀 상대 성적이 각각 5승11패. 그러나 올해는 출발부터 좋다. 두산과의 잠실 원정 3연전에서 2승1패로 출발한 게 좋은 조짐이다. 무엇보다 지난 주말 넥센과 홈 3연전에서 싹쓸이 승리를 거뒀다. 무려 4년8개월 만에 넥센전에서 스윕을 달성했다. 지난 2년간 도합 9승밖에 못 따냈던 넥센에 확실히 기선 제압을 했다.
롯데와 공동 2위에 올라 있는 kt 역시 심상치 않은 출발을 했다. kt는 지난해 최하위 팀이다. 대부분 팀 상대 전적에서 열세였다. 두산(3승13패)과 넥센(4승12패) 상대 성적은 특히 치명적이었다. 고비마다 두 팀을 만나 상승세가 꺾였다. 올해는 호각세다. 두산과의 첫 맞대결에서 1승1패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넥센전에선 상대 타격의 사이클이 최고조일 때 만나 2패를 먼저 당했다. 하지만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막판 뒤집기에 성공했다. 1승 이상의 가치가 있는 승리를 따냈다. 지난해에는 볼 수 없던 뒷심이다.
영원한 천적은 없다. 오히려 천적을 넘어섰을 때의 성취감이 팀을 더 강하게 만든다. 시즌 초반 KIA의 질주와 kt·롯데의 약진이 점점 더 흥미로워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