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홈구장 입구 구단 상징 독수리,프랑크푸르트 엠블러(독수리마크) 앞 차붐. 사진=피주영 기자 지난 21일(한국시간) 독일축구연맹(DFB)과 인터뷰를 위해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코메르츠방크아레나(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홈구장)의 기념관을 찾은 차범근(64)은 색이 조금 바랜 우승컵 하나를 들어 보였다. 바로 1979~1980시즌 유럽축구연맹(UEFA)컵 우승 트로피다.
1978~1979시즌 다름슈타트에서 한 경기만 뛴 차범근은 1979년 6월 프랑크푸르트 유니폼을 입으며 본격적인 분데스리가 인생을 시작했는데 입단 첫해에 프랑크푸르트 구단 사상 첫 UEFA컵 정상을 이끈 것이다. 그때 이후 40년 만에 다시 트로피를 품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웃었다.
▲우승트로피 들고 영광 떠올리는 차붐. 사진=피주영 기자 "팀에 적응도 완벽히 마치기 전에 우승을 경험했다. 원하면 늘 할 수 있는 것이 UEFA컵인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UEFA컵이 얼마나 힘든 대회인 줄 깨닫게 됐다.(웃음)"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전성기의 문을 활짝 열었다. 1983년까지 122경기를 출전한 그는 46골을 쏟아 내며 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떠올랐다. 이 기간에 차범근은 우승 트로피도 2개(1979~1980시즌 UEFA컵·1980~1981시즌 DFB포칼)나 따냈다. '차붐(Chabum·골로 수비를 폭격한다고 해서 생긴 애칭)'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때다. 그와 함께 UEFA컵 우승을 일군 칼 하인츠 쾨르벨(63)은 일간스포츠와 인터뷰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차붐은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완벽한 공격수(der Perfekteste Stürmer)였다."
1972년부터 프랑크푸르트에서만 20년을 뛴 쾨르벨은 분데스리가 역대 최다 출전(602경기) 기록을 보유한 '전설의 철인'이다. 쾨르벨은 "차붐은 자신만의 특별한 플레이 스타일을 갖춘 '특급 스타(Super Profi)'였다"고 덧붙였다.
▲사진=피주영 기자
쾨르벨과 같은 동료 선수들만 차붐을 추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유럽중앙은행과 쇼핑가가 만나는 프랑크푸르트시의 중심부 빌리-브란트-플라츠가 대표적이다. 빌리-브란트-플라츠 역사 내에는 '프랑크푸르트의 수호자(Säulen der Eintracht)'라고 불리는 12개의 기둥이 자리잡고 있다.
각 기둥에는 '아인트라흐트 레겐덴 11(Eintracht Legenden 11·프랑크푸르트의 전설 11인)'과 대표 사령탑의 인물화가 새겨져 있다. 2013년 1월 프랑크푸르트 팬들이 직접 뽑은 것인데 이 투표에서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 역대 최다골 기록 보유자 베른트 휄첸바인(71·420경기·160골)과 나란히 공격수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차범근은 그라운드 안팎에서 감동을 주는 선수였다. 1980~1981시즌 레버쿠젠전 도중 그는 위르겐 겔스도르프에게 거친 태클을 당하며 허리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해 선수 생명을 위협받을 정도였고, 구단에서는 상대 선수를 고소라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차범근은 놀랍게도 상대 선수를 용서해 독일 축구계는 물론이고 시민들까지 놀라게 했다.
▲사진=피주영 기자 차범근은 "나는 처음 독일에 와서 독일 사람들이 굉장히 차갑고 상대팀에 대한 관심이 덜한 것 같았다"면서도 "1981년 부상 당시 제가 상대 선수를 용서한다고 하자 독일인들이 나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 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10년간 옐로카드 1장만 받았으니 정말 그라운드 위에서 페어플레이한 것 아닌가 싶다. 내가 최선을 다한 것에 대한 보답인 같다. 나 역시 늘 독일 팬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