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의 대명사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앞세운 아이돌 그룹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노래가 모든 청춘의 노래는 아닙니다. 눈에 많이 띄지 않지만, 다양한 청춘은 그들의 희망, 사랑, 좌절, 아픔 등을 담아 노래하고 있습니다. 큰 무대에 설 기회는 적지만,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청춘들의 꿈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일간스포츠는 방송사나 매체에서 소개될 기회가 많지 않은, 청춘뮤지션들의 이야기를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스텔라장에게 청춘이란 뭘까요>스텔라장에게> "청춘이란 마음 속에 있는 겁니다. 나이와 상관 없다고 생각해요. "
'난 매일 손꼽아 기다려/한달에 한번 그댈 보는 날/가난한 내 마음을 가득히 채워 줘/눈 깜짝하면 사라지지만/난 그대 없인 살 수 없어/왜 자꾸 나를 두고 멀리 가/가난한 내 마음을/가득히 채워 줘/눈 깜짝하면 사라지지만' -스텔라 장의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 중
스텔라 장은 프랑스 유학파 출신이다. 뮤지션보다 '뇌섹녀'라는 단어가 연관 검색어에 뜰 정도로 인재다. 프랑스에서 14년간 공부하며 생명공학, 공업경영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 14년간 공부했던 걸 접었다. 인턴으로 있던 회사에서는 계약서까지 내밀었다. 하지만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던 회사를 그만 두고, 뮤지션이라는 불투명한 길을 선택했다.
"우울할 때 음악을 하는 게 말도 안 되는 모험이었나 싶다. 그런데 음악에 도전도 안 해보고 회사를 다녔다면 평생 후회하면서 살았을 것 같아요."
스텔라 장은 알면 알수록 반전의 매력이 두드러졌다. 음악을 빅뱅으로 시작했지만 SM 음악을 즐겨 듣고, 힙합 커뮤니티를 활동하며 래퍼의 꿈을 키웠지만 현재는 통기타를 들고 싱어송라이터로 활약 중이다.
"굳이 아름답지 않은 걸 아름답게 포장하고 싶지 않아요. 썩어가는 무언가를 사탕으로 덮는다고 그 안의 것이 사탕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치부는 드러내고 치료하는게 맞다고 생각해요. 이런 면이 음악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요."
'뇌섹녀'보다 '반전녀'에 가까웠던 스텔라 장의 인터뷰 세계로 초대한다. '청춘별곡' 세 번째 손님은 잔나비·오왠에 이어 스텔라 장이다.
- 프랑스 유학파예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14세부터 25세까지 11년간 유학생활을 했어요. 프랑스에서 석사까지 마쳤고요. 그렇다고 금수저는 아니에요. 외동딸이어서 부모님의 투자를 '몰빵'으로 받았어요. 나름대로 먹고 싶고 입고 싶은 것 참았고, 과외하면서 생활비를 벌었어요. 프랑스는 한국보다 학비가 싸서 웬만한 과외비 보다 덜 들었을 거예요."
- 프랑스에서 혼자 살았나요. "처음에는 홈스테이를 했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자취를 했어요."
- 외롭진 않았나요. "타고난 성격이 혼자있는 걸 좋아해요. 외로운 것보다 서류나 체류증 등을 갱신할 때 관공서를 돌아다니면서 '이걸 왜 혼자 해야 하지' 하며 서러운 게 있었어요. 특히 이사 다닐 때 가장 서러웠어요. 프랑스가 일처리가 굉장히 늦은 편이라 시간이 오래걸려요."
- 대학에서 어떤 걸 전공했나요. "생명공학을 전공했어요. 프랑스에 '그랑제꼴(Grandes Ecoles, 정치·행정·경영·공학 등 특화된 분야의 소수 정예만 입학시켜 교육시키는 프랑스 고등교육기관 유형 중 하나)'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한국으로 따지면 학부는 생명공학을, 석사는 공업경영 학위를 취득했죠."
- 음악을 전공한 게 아니네요. "음악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고 하고 싶었어요. 유학 중이어서 부모님께 이 모든 걸 그만두고 음악을 하겠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물론 마음을 먹었으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엔 객기가 부족했어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유학을 보내주셔서 졸업은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어요."
- 공부 대신 음악을 하고 있는데 아깝진 않나요. "그것도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 같아요. 음악적 성향에 소금이 됐어요. 밑거름이죠."
- 곡에 자유로움이 묻어나는데, 유학파라서 그럴까요. "일단 부모님이 자유로운 성격이에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한국에 와서 인턴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이라는 곡을 만들었어요. 경험이 없다면 상상해서 써야 하는데, 그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감을 얻어내지 못 했을 것 같아요."
- 회사는 왜 그만 뒀나요. "학교 졸업을 위해서 이수해야하는 '인턴 학점'이 있었어요. 그게 6개월이었죠. 인턴을 마치고 정직원으로 안 남고 졸업을 했어요. 계약서까지 받았는데 음악을 하겠다고 박차고 나왔죠. 회사에서도 쿨하게 하고 싶은 거 해야지 하면서 보내주셔서 감사했어요."
- 프랑스에서 회사를 다녔나요. "우리나라에 있는 프랑스 계열 회사였어요."
- 회사 나온 걸 후회하진 않나요. "두 가지가 서로 공존하는 것 같아요. 뮤지션은 규칙적이지 않은 직업이라 업다운도 심하잖아요. 우울할 때 음악을 하는 게 말도 안 되는 모험이었나 싶다가도, 음악에 도전도 안 해보고 회사를 다녔으면 평생 후회하면서 살았을 것 같아요. 부모님께서도 '투잡을 하면 어떠냐. 굳이 위험한 길을 가려고 하냐'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엄마가 '네가 하고 싶은 걸 우리가 못 하게 막아서 원망을 듣고 싶지 않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 부모님이 대단한 분이신 것 같아요. "항상 제 인생의 선택은 제가 하게 해주셨어요. 그리고 항상 제 선택은 다수가 선택하지 않은 걸 선택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프랑스 간 것도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길이잖아요. 어떤 부모가 어린 애를 외국에 보내려고 할까요. 그냥 제가 가겠다고 했고, 그 나이에 저를 믿어주신 부모님이 아직까지 신기해요. 전 나중에 제 자식에게 이렇게 못 할 것 같아요."
- 유학 생활을 오래했는데 부모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요. "부모 자식관의 관계에서 대화가 중요하잖아요. 정말 통화를 자주했어요. 오히려 한국에 있었으면 집에서 부대끼면서 많이 싸웠을 것 같아요. 프랑스에 있을 때 심리적으로는 불안하진 않았어요. 부모님도 힘들면 돌아오라고 했고, 제가 고집부리고 남아있었죠."
- 2014년에 데뷔했어요. 어떤 경로로 회사와 계약했나요. "소속사에 긱스라는 힙합 듀오가 있어요. 그 친구들과 고등학교 때 같은 크루에서 활동을 했어요. 사실 제가 힙합으로 음악을 입문했어요. 인터넷에서 힙합 커뮤니티에서 긱스를 만났고, 친분을 유지하다가 긱스가 있는 소속사에 들어왔죠."
- 힙합을 하다가 지금의 장르로 바꾼 이유가 있나요. "예전엔 랩만 했었어요. 스무살 기점으로 다른 장르에 눈을 떴죠. 그때 구석에서 썩고 있던 기타에 관심이 생겼어요. 입시 준비할 때 스트레스를 받다가도 기타를 치는 시간만큼은 하루 중 유일한 낙이었죠. 공부보다 기타 연습을 더 많이 했어요. 기타를 치다보니 자연스럽게 곡을 써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만든 첫 곡이 '잇츠 레이닝'이었어요."
- 첫 곡이 명곡이네요. "처음에 아무생각 없이 쓸 때가 잘 됐던 것 같아요."
- 지금은 작업이 힘든가요. "지금 옛날 곡들을 들어보면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을까 싶어요. 대신 '잇츠 레이닝' 같은 곡은 멜로디 구성의 아쉬움은 없는데, 지금 쓴다면 가사는 좀더 잘 쓸 것 같아요.(웃음)"
- 가사는 많이 부족했던 것 같나요. "그렇다고 지금 쓰는 가사가 다 좋지는 않은 것 같아요. 지금이 슬럼프 아닌 슬럼프예요."
- 작업하면서 가장 힘든 게 뭔가요. "자기 창작물에 대해 객관성이 없잖아요. 저는 정말 좋은데 다른 분들은 아니라고 할 경우고 있고, 정말 별론데 이걸 발표하라고 할 경우도 있어요. 저의 기준이 들으시는 분들과 다르다는 점이 힘들어요."
- 그럼 앨범에 실리는 곡들의 기준은 뭔가요. "앨범은 제가 발표하고 싶다고 발표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회사가 존재하고요. 제작도 회사가 하죠. 저도 반대하지않고 회사도 반대하지 않는 곡을 모아서 앨범을 만들어요."
- KBS '올댓뮤직'에서도 상반기 주목하는 신인으로 선정했어요. "정말 감사해요. 신인이 아닌데 주목할 만했나봐요.(웃음) 사실 2014년에 음원 하나 던지고 데뷔한 뒤 계속 학교를 다녔어요. 본격적인 활동이 지난해 10월이니까 신인은 신인이죠."
이미현 기자 lee.mihyun@joins.com 사진·영상=박찬우 기자, 영상 편집=민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