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기다리는 자에게 복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애쓰고 매달린 설경구의 연기도 드디어 통했다. 매주 쏟아진 수 많은 작품들 속 9월 스크린 승자는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의 좋은 예가 됐다.
지난 6일 개봉한 '살인자의 기억법'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 14일까지 158만명을 누적하는데 성공했다. 손익분기점은 220만 명으로 특별한 경쟁작이 없는 상황에서 지금같은 속도라면 흥행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크랭크업 후 개봉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완성도에 대한 관계자들의 걱정이 상당했지만 뚜껑열린 '살인자의 기억법'은 공들인 티를 팍팍내며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스토리와 장르 특유의 분위기상 관객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지만,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뽑아내고 영혼을 담아 다듬어냈다는 느낌을 선사한 것.
비주얼부터 압도하는 설경구를 중심으로 양 날개를 책임진 김남길·김설현도 구멍없이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물론 원작을 미리 본 관객들과, 영화로 처음 '살인자의 기억법'을 접한 관객들의 반응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소설이 영화로 옮겨지면서 설정 자체가 바뀐 부분이 상당한데다가 텍스트와 영상으로 보는 것은 또 그만한 차이가 있기 때문.
이에 원작과 영화를 모두 접한 원작파와, 또 영화로만 관람한 영화파 영화기자의 같지만 다른 시선을 동시에 전한다. 출연: 설경구·김남길·설현·오달수 감독: 원신연 줄거리: 알츠하이머에 걸린 은퇴한 연쇄살인범이 새로운 살인범의 등장으로 잊혀졌던 살인습관이 되살아나며 벌어지는 범죄 스릴러 등급·러닝타임: 15세 관람가·118분 개봉: 9월 7일
조연경 기자의 신의 한 수: 명불허전 설경구·재발견 김설현 부녀의 찰떡궁합. 의외의 성과다. 환상의 짝꿍이 탄생했다. 영화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와 빠져드는 이유가 같다. 눈에 밟히고, 그 이상으로 눈에 띈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관람한 관객들의 8할은 '또 다른 설경구, 또 다른 김설현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스토리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다면 남은 것은 캐릭터 싸움이다. 이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뒷받침 돼야 살아날 수 있는 지점이다. 원신연 감독과 배우들은 그 어려운 것을 해냈다. 어지럽게 얽히고 설킨 장면들이 늘어날 때마다 설경구는 신뢰의 무게감을 잡고 김설현은 끊임없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성은 작품의 장르를 '스릴러'에서 시작해 '휴먼'으로 집결되게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단순한 스릴러 영화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트릭은 성공적이다. 집착에 가까운 액션은 영화적이면서도 현실감 넘친다. 액션 앞에서만큼은 성별의 구분도 자비도 없다.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설정을 통해 공포와 감동, 재미를 모두 잡아낸 것도 비상하다.
박정선 기자의 신의 한 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와 비교될 수밖에 없다. 너무 똑같다면 지루할 것이고, 너무 다르다면 그것 또한 혼란스러울 것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기본 설정은 그대로 가져오되 엔딩 부분을 완전히 바꾸었다. 예상대로 흘러가다 마주친 반전에 원작 팬들도 놀라며 집중한다. 기대 이상의 각색으로 원작의 함정에서 교묘히 벗어났다. 또한 '살인자의 기억법'은 설경구가 있기에 가능했다. 영화는 알츠하이머 환자 설경구의 의식과 생각, 시선을 따라 진행된다. 현실인지 망상인지 모를 혼란 속에서 자칫 방향성을 잃고 흩어져버릴 수 있는 이야기를 부여잡은 이가 설경구다. 분장이 아닌 극한 다이어트를 통해 낡은 겉모습을 만들어내고, 격렬하게 떨리는 눈가로 알츠하이머 환자의 의식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향한 호평 중 대부분이 바로 설경구를 향한 신뢰인 이유다.
조연경 기자의 신의 악수: '꼭 봐야 할' '안 보면 후회 할'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게 만든다. 뛰어나게 재미있지도, 뛰어나게 신선하지도 않다. 애매하지는 않지만 적당하다. 흥행을 해도, 하지 못해도 이를 뒷받침 할 만한 이유는 각기 충분하다. 관객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일부러 꼬아놓은 장면들은 몰입도를 헤치고, 무분별하게 반복되는 신도 종국에는 지겨움을 동반한다. 무엇보다 설경구·김설현이 빛난만큼 김남길의 캐릭터는 100% 빛을 발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다. 비중에 비해 기억에 남지 않는다. 허상과 실제 사이, 트릭 속 인물로 관객을 헷갈리게 만드는 인물이다 보니 김남길의 연기, 그가 연기한 캐릭터 자체에 집중하기 힘들다. 클라이막스 액션 신 직전 드러나는 비밀은 헛웃음을, 여성을 콕 집어 언급하는 대사는 꽤 불쾌하다. 그래서 '살인자의 기억법'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물음표다.
박정선 기자의 신의 악수: 원작의 설정을 잘 활용하긴 했지만, 소설에 비해 엔딩까지 가는 길이 다소 느리고 평탄하다. 한장 한장 넘기며 '쪼이는 맛'을 선사하는 원작에 비해 영화는 중반에 이르기까지 필요 이상으로 늘어지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원작엔 없는 액션신이 다수 포함됐는데, 이 또한 불만족스럽다. 젊은 시절 연쇄살인마라곤 하지만 람보처럼 다시 일어나는 노인이라니, 설정이 과하다. 무술 감독이 의도를 넣어 포함시킨 장면이라곤 하나, 김설현이 액션신에 투입됐을 때 실소가 터져나온다. 액션신 전체의 긴장감을 툭 끊기게 만드는 오점. 김남길 활용법도 아쉽다. 원작이 설경구가 연기한 김병수 혼자 이끌어나간다면, 영화는 김남길이 맡은 민태주가 또 다른 축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양축이라고 하기엔 김남길에겐 시선이 가지 않는다. 영화를 지탱하는 뼈대 한쪽이 무너져버리니 불균형이 생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