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리그 최강팀을 가리는 무대. 한국시리즈다. 정규시즌 우승은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페넌트레이스에서 1위를 하지 못한 팀도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먼저 올리면 그해 '우승팀'으로 기록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시리즈는 더 긴장감이 넘치고 극적이다.
올해 한국시리즈에선 정규시즌 우승팀 KIA와 2위팀 두산이 맞붙었다. 두 구단 모두 전신 해태와 OB 시절부터 여러 차례 한국시리즈를 경험해온 역사의 팀이다. 타이거즈와 베어스가 과거 한국시리즈에서 남긴 인상적인 장면들을 모았다.
◇해태 김상진, 젊은 투수의 마지막 불꽃
해태 고졸 2년차 투수였던 김상진은 1997년 10월 25일 LG와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인생 최고의 가을을 보냈다. 9이닝을 2안타 2볼넷 1실점으로 막아내면서 완투승을 따냈다. 해태가 6-1로 승리해 통산 아홉 번째 우승을 확정한 날이었다.
2차전에서 3회를 못 넘기고 강판됐던 김상진은 5차전에서 아쉬움을 털어냈다. 20세 7개월 나이로 역대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 투수로 기록됐다. 그러나 그 경기가 투수 김상진에게 마지막 환희이자 영광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막 꽃을 피우려 했던 젊은 투수는 2년 뒤인 1999년 6월 10일, 22세 3개월 2일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갑작스럽게 위암 선고를 받은 지 8개월 만이었다. 최고의 무대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안타깝게 사그라졌다.
◇OB 김유동의 우승 확정 만루홈런
OB 김유동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영원히 기록에 남을 그랜드슬램 하나를 쏘아 올렸다. OB 박철순과 명품 완투 대결을 펼치던 삼성 이선희를 마지막 순간 울렸다. 김유동은 그날 타격감이 최고조였다. 이미 2회 이선희의 초구를 때려 솔로홈런을 쏘아 올린 뒤였다. 또 5회 2사 1·2루서는 3-3 동점을 만드는 중전 적시타도 만들어 냈다. 8회까지 같은 스코어로 팽팽한 승부가 이어졌다.
OB는 9회 김경문의 기습번트 내야안타로 기회를 잡았다. 2사 만루서 신경식이 밀어내기 볼넷을 골랐다. 결승점. 그러나 승리를 확신하기 위해서는 점수가 더 필요했다. 계속된 만루에서 김유동이 이선희의 다시 초구를 공략했다. 타구를 동대문구장 담장 너머로 날려 보냈다. 사상 첫 한국시리즈 만루포였다. 김유동은 이날 6타점을 올려 원년 한국시리즈 MVP가 됐다. 부상으로 승용차를 받았다.
◇KIA 나지완, 역사적인 7차전 끝내기포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고의 홈런을 꼽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우승을 결정짓는 끝내기 홈런을 '마지막 승부'인 7차전에서 때려낸 선수는 역대 단 한 명뿐. KIA 나지완이다.
2009년 KIA와 SK는 3승 3패로 팽팽하게 맞선 채 운명의 7차전을 맞았다. 초반 분위기는 한국시리즈 3연패에 도전한 SK 쪽에 유리하게 흘렀다. 6회초까지 5-1로 앞서갔다. KIA 타선은 늦게 발동이 걸렸다. 나지완이 6회말 2점 홈런으로 추격 시동을 걸었다. 7회말 안치홍의 솔로홈런과 김원섭의 적시타로 2점을 만회해 5-5 동점을 이뤘다.
마침내 찾아온 운명의 9회말. 투수를 모두 소진한 SK는 팔꿈치가 아파 쉬고 있던 채병용을 마운드에 올렸다. 반면 타석에 선 나지완은 앞선 타석에서 홈런을 터트린 뒤라 자신감이 충만했다. 볼카운트 2B-2S서 채병용이 던진 5구째 시속 143km 직구가 약간 높게 들어갔다. 완벽한 먹잇감을 찾은 나지완이 무섭게 배트를 돌렸다.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모두가 홈런임을 직감했다. 역사적인 타구 하나가 잠실구장 하늘을 갈랐다.
나지완은 이미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잠실구장 베이스를 돌았다. KIA 선수들은 얼싸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KIA는 그렇게 '해태'에서 'KIA'가 된 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두산, 한국시리즈 최다 점수차 역전승
두산의 화력은 예나 지금이나 강했다. 2001년 삼성과 한국시리즈 4차전. 두산은 1회 타이론 우즈의 2점 홈런이 터지면서 앞서 나갔다. 그러나 곧바로 삼성이 2회초 공격에서 무려 8점을 뽑았다. 이승엽의 2루타를 포함해 안타 7개, 몸에 맞는 공 2개가 연이어 나왔다. 당황한 두산 야수들은 실책까지 보태 삼성을 도왔다. 반면 두산은 2회말 무사 만루를 만들었지만 단 1점만 뽑았다. 승기는 일찌감치 삼성 쪽으로 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진짜 '기회'는 3회말에 찾아왔다. 우즈와 심재학이 연속 볼넷으로 걸어나갔다. 김동주의 안타로 무사 만루가 됐다. 안경현이 밀어내기 볼넷을 얻었다. 4-8. 삼성은 선발 투수 발비노 갈베스를 내리고 김진웅을 구원 투입했다. 그러나 홍성흔이 2타점 적시타를 쳤다. 6-8. 전상열의 적시타에 이어 정수근이 마침내 역전 2타점 적시타를 작렬했다. 9-8. 장원진도 적시타로 한 점 추가했다. 10-8.
두산은 상대 실책과 볼넷을 묶어 다시 1사 만루를 만들었다. 여기서 김동주가 나섰다. 만루홈런을 쳤다. 팀 선배 김유동 이후 19년 만에 나온 한국시리즈 그랜드슬램. 삼성의 추격 의지가 완전히 꺾였다. 아직 그랜드슬램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사이, 안경현은 연속타자 홈런으로 점수를 더 추가했다. 15-8.
한 이닝에만 타자 16명이 나서 12득점했다. 불과 하루 전인 3차전에서 자신들이 세운 포스트시즌 한 이닝 최다 득점(9점) 기록을 하루만에 갈아 치웠다. 한국시리즈 최다 점수차 역전승과 팀 최다 득점·타점 기록도 새로 나왔다. '미러클 두산'이라는 별명을 그렇게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