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전은 전력만으로 승부를 가늠할 수 없다. 수십 년째 이어진 양국의 경쟁 의식이 긴장감과 집중력을 부풀린다. 그 차이로 승패가 갈렸다.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에 참가하는 젊은 대표팀도 전력은 일본보다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전에도 우세한 평가로 일본전을 치른 적은 없다. 그럼에도 수차례 지고 있던 경기를 뒤집었다. 2015년에 열린 프리미어 12에서는 0-3으로 뒤진 9회에 4득점하며 역전승을 거뒀다. 일본은 앞서 있을 때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역대 한일전을 돌아본다.
◇ '개구리 번트+끝내기홈런' -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1982년 9월 14일)
선동열 대표팀 감독의 국제 대회 데뷔 무대였다. 최동원, 김시진 등 걸출한 선배 투수들을 제치고 에이스 역할을 해냈다. 4경기에 나섰고 3번이나 완투승을 거뒀다. '숙적' 일본과 결승전도 나섰다. 2회 2점을 내줬지만 이후엔 완벽투를 선보였다.
타선도 부응했다. '약속의 8회'가 시작된 경기다. 무사 1루에서 김정수가 중견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치며 1점을 추격했다. 희생번트로 주자를 3루까지 보낸 상황에서 김재박이 타석에 섰다. 이후에도 꾸준히 회자되는 '개구리 번트'가 나온다. 스퀴즈를 눈치챈 일본 배터리가 피치아웃을 했다. 하지만 김재박이 껑충 뛰어올라 그 벗어난 공을 배트에 맞췄다. 공은 3루 선상으로 흘렀고 주자는 홈을 밟았다.
한대화가 쐐기를 박았다. 후속 타자가 안타를 치며 만든 1·3루에서 몸 쪽 높은공을 통타해 좌측 폴대를 맞히는 스리런홈런을 때려 냈다. 잠실구장이 들끓었다. 9회에 오른 선동열이 실점 없이 27번째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다. 최종 스코어는 5-2.
한국은 미국과 준결승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 탓에 2-3으로 패했다. 쿠바에 6-9로 패한 일본과 동메달을 놓고 맞대결이 성사됐다. 2000년 9월 27일. 타선은 일본 에이스 마쓰자카 다이스케에게 7회까지 침묵했다. 하지만 '일본 킬러' 구대성의 호투 덕분에 팽팽한 승부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승부는 '국민타자' 이승엽의 손에서 갈렸다. 앞선 세 타석 모두 삼진으로 물러난 그에게 2사 1·3루 득점 기회가 놓였다. 풀카운트에서 들어온 바깥쪽 직구를 밀어 쳐 좌중간을 가르는 2타점 적시타를 올렸다. 다시 '약속의 8회'가 재현됐다. 2-0으로 앞선 한국은 이후 김동주가 추가 적시타를 쳤고, 9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구대성이 일본의 추격을 1점으로 막아 내며 3-1로 승리했다. 이승엽은 결승타, 구대성은 11삼진을 솎아 내며 완투승을 거뒀다.
◇ '도쿄 대첩' - 2006 WBC 1라운드 예선(2006년 3월 5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은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야구의 범세계화를 도모하기 위해 신설한 대회다. 일본은 아시아 맹주를 넘어 종주국 미국을 위협하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한국, 대만은 안중에 없었다. 오 사다하루 일본 대표팀 감독은 예선 전승을 장담했고, 간판타자인 스즈키 이치로는 "한국이 향후 30년 동안 이길 생각을 못 하게 해 주겠다"며 과도한 자신감을 보였다.
이승엽이 일본의 자존심을 구겨 놨다. 1-2로 지고 있던 8회초 1사 1루에서 상대 마무리 투수 이시이 히로토시의 변화구를 받아 쳐 우측 담장에 꽂히는 역전 투런홈런을 쳤다. 이제는 은퇴한 이승엽이 "잊을 수 없다"고 꼽은 순간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후 8회 구대성, 9회 박찬호가 일본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아 내며 3-2로 승리했다. 0-2로 뒤진 4회말 2사 만루에서 안타성 타구를 다이빙하며 잡아낸 이진영의 호수비도 극찬을 받았다. 이날 경기의 평균시청률은 23.8%. 열도는 침묵하고 반도는 열광했다.
2008년 8월 22일 베이징 우커송경기장. 한일WJS 준결승에서 이승엽
◇ '이승엽의 눈물' - 베이징올림픽 준결승(2008년 8월 22일)
한국 야구는 베이징올림픽을 통해 한국 스포츠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예선부터 9전 전승을 거두며 남자 단체 구기 종목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일전은 그 기로에 있었다.
아시아예선과 본선 리그전 2경기에선 1승1패로 맞섰다. 세 번째 승부. 다시 이승엽이 '약속의 8회'를 재현했다. 이전 7경기에서 22타수 3안타로 부진했다. 하지만 2-2 동점이던 8회 1사 1루에서 일본 마무리 투수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우월 투런홈런을 때려 냈다.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뜬공에 그칠 것 같던 타구가 힘을 잃지 않았다.
4-2로 앞선 한국은 이후 일본 좌익수 G.G. 사토의 포구 실책을 틈타 추가 득점에 성공했다. 6-2로 승리했다. 선발투수 김광현도 8이닝을 2실점(1자책)으로 막아 내며 승리의 일등공신이 됐다. 경기 뒤 이승엽은 "그동안 부진해 후배들에게 미안했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한국은 결승에서 쿠바를 꺾고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 '야구는 9회부터' - 프리미어 12 준결승(2015년 11월 19일)
2446일 만에 도쿄에서 열리는 한일전. 리그 최고의 스타 오타니 쇼헤이를 선발투수로 내세운 일본은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 타선은 7회까지 오타니의 강속구를 공략하지 못했고 1안타 무득점에 그쳤다. 선발투수 이대은이 흔들린 4회에만 3점을 내주며 끌려 갔다.
그러나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고쿠보 히로키 일본 감독은 투구 수가 85개에 불과했던 오타니를 8회 수비 시작과 함께 교체했다. 그리고 바뀐 투수 노리모토 다카히로를 공략했다. 9회 마지막 공격이었다. 오재원과 손아섭이 연속 안타로 만든 기회에서 정근우가 좌익 선상 2루타를 치며 첫 득점을 올렸다. 이용규는 사구로 출루해 만루를 만들었다. 일본은 투수를 마쓰이 유키로 교체했지만 김현수가 볼넷을 얻어 내며 밀어내기 득점을 했다.
이대호가 승부를 갈랐다. 이어진 만루 기회에서 바뀐 투수 마스이 히로토시를 상대했고 좌익 선상 안타를 치며 주자 2명을 불러들였다. 한국이 4-3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추가 득점은 없었지만 정대현과 이현승이 9회를 실점 없이 막아 내며 승리를 거뒀다. 일본 야구의 심장에 다시 한 번 비수를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