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북한 인권 특별보고관이 '북한 귀순 병사 수술 상황을 언론에 공개한 것은 사생활 침패'라고 비판했다. 큰 위로가 됐다."
김종대 정의당 의원은 지난해 말 북한 귀순 병사의 의료 기록을 공개한 것을 두고 "사생활 침해"라고 비판했다가 대중의 뭇매를 맞았다.
군사전문가인 김종대 의원은 이국종 아주대병원 중증외상센터장이 지난해 11월 22일 총상을 입은 채 귀순한 북한군 병사의 의료기록을 지나치게 상세하게 언론에 공개하자 자신의 소셜네트워크(SNS)에 글을 올렸다. 그는 '귀순한 북한 병사는 북한군 추격조로부터 사격을 당해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부정당했다. 남쪽에서 치료받는 동안 몸 안의 기생충과 내장의 분변, 위장의 옥수수까지 다 공개돼 또 인격의 테러를 당했다'라고 썼다. 이어 '이 병사를 통해 북한은 기생충의 나라, 더러운 나라, 혐오스러운 나라가 됐다. 저는 기생충의 나라 북한보다 그걸 까발리는 관음증의 나라, 이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에 이국종 센터장은 자신을 포함한 의료진은 환자의 목숨을 구해 그의 인권을 지켰을 뿐이라는 점을 들며 김종대 의원의 비판에 따른 억울한 심경을 우회적으로 반박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이국종 신드롬'이 불고 있었다. 일부 언론 매체가 그를 2017년을 대표하는 '올해의 인물'로 꼽았다. 이국종 센터장이 중증외상센터의 어려운 사정을 토로할 때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외상센터를 도와달라'는 청원글이 올라올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대중은 이국종 센터장을 비판한 것으로 비춰진 김종대 의원을 향해 비난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원내 소수정당인 정의당 소속이었던 김종대 의원은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수일 동안 폭풍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의원 사퇴를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김종대 의원이 "오해다. 나는 이국종 센터장을 지적한 것이 아니다. 이국종 센터장을 만나서 오해를 풀겠다"고 했으나 비난 여론은 더 커졌다. 결국 김종대 의원은 정의당 등의 입장을 고려해 유감을 표명 했다.
지난 10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만난 김종대 의원은 "나흘 가량 포털사이트 검색에 상위권에 내 이름이 올랐다. 내가 원하지 않은 프레임이 덫씌워져 있었다. 페이스북에 댓글이 4000여개가 달렸다. 마치 전국민과 싸우는 느낌이었다"고 한 달여 전 기억을 떠올렸다. 이어 "확신이 있어서 말 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잠을 편히 잤다. 스스로 물어보건데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맞는 말을 했다'면 그건 행복한 것"이라고도 했다.
굳건하던 그는 여파가 정의당 이미지와 정당 후원회 까지 미치자 흔들렸다고 한다. 당을 위해서 약속한대로 이국종 센터장을 만나 사과를 해야 하는지 고민도 했다. 그런데 그때 CNN에 귀순 병사의 수술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고 마음을 돌렸다. 김종대 의원은 "CNN이 단독보도라면서 귀순 병사의 몸에서 나온 기생충을 보여주더라. 그 순간 사과를 못 가겠더라. 전 세계적으로 기생충 장사가 계속되고 있는데… 양심상 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국종 센터장을 찾아가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아 무거웠던 마음의 짐도 털어냈다. 토머스 오헤아 퀸타나 UN 북한 인권 특별보고관은 지난달 12일 북한 귀순 병사의 수술 상황을 언론에 공개한 행위는 사생활 침해라고 지적했다. 퀸타나 보고관은 최근 비무장지대를 넘어 귀순한 북한 병사를 한국 당국이 공개적으로 다룬 방식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며 "북한 병사의 수술 상황, 신체 상태를 참혹할 정도로 세밀하게 공개함으로써 그의 프라이버시를 심각하게 침해한 사실은 인권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귀순병사는 한국 정부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에 그 책임 또한 정부에 있다는 사실도 명확히 했다.
김종대 의원은 "퀸타나 보고관이 나보다 더 세게 비판했더라. 혼자 싸우면서 입은 마음의 상처가 사라지고 정상성을 회복했다. 큰 위로가 됐다"며 "퀸타나 의원이 개인적으로 귀순 병사의 인권 문제를 꺼낸 나를 거론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김종대 의원은 2016년 정의당 비례대표로 20대 국회에 입성했다. 정의당은 '군사통'인 그를 영입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고, 그 역시 주저 없이 정의당을 함께 걸어갈 당으로 결정했다. 그에게 "1년9개월 간의 시간은 어땠나"라고 물었다.
이런 답이 돌아왔다.
"생지옥이었다. 전문가로서 책을 쓸 시간이 없다는 것이 가장 뼈 아팠다. 그런데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고통의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앞으로는 강인한 의지를 갖고 사상의 씨앗을 단단하고 작게 만들되 유연한 자세로 나아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