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난'을 호소하던 충무로 여자 배우들이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김태리·김지원·심은경 등 20대 젊은 배우들을 중심으로 영화판의 여성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남자들을 보조하는 소모적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얼굴로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이를 주도하는 배우는 김태리다. 2월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감독)'로 류준열을 제치고 출연진 명단 1번에 이름을 올렸다. 이 영화는 시험, 연애, 취업, 뭐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김태리(혜원)가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오랜 친구인 류준열(재하)·진기주(은숙)와 특별한 사계절을 보내며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속 모든 사건이 김태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2016년 영화 '아가씨(박찬욱 감독)'로 얼굴을 알린 그는 단 세 편 만에 첫번째 주인공으로 올라섰다. 최근 600만 관객 돌파에 성공한 영화 '1987(장준환 감독)'에서는 홍일점으로 활약한다. 김윤석·하정우·유해진 등 걸출한 대선배들 사이에서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가 맡은 87학번 연희는 여성이라기보다는 '보통 사람'임이 강조되는 역할. 영화의 엔딩은 김태리가 연기하는 연희의 몫이다.
아직 영화판에서 익숙한 얼굴은 아니지만, 2월 8일 개봉하는 '조선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김석윤 감독)'로 관객과 만나는 김지원도 주목할 만하다. 그간 '조선명탐정' 시리즈에서 여배우는 김명민·오달수 콤비에 곁들여지는 존재였다. 연기나 역할보다는 미모가 강조됐다. 그러나 이번 세번째 '조선명탐정'은 조금 다르다. 김지원이 연기하는 기억을 잃은 괴력의 여인 월영은 미모가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조선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 측은 "이전 시리즈의 여성 캐릭터와 달리 월영은 사건 해결에 없어서는 안될 공을 세우며 명탐정 콤비의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시리즈 사상 가장 적극적인 여주인공"이라고 콕 집어 설명했다.
31일 선보이는 영화 '염력(연상호 감독)'의 심은경도 류승룡의 뒤를 이어 출연진 명단 두번째에 이름을 올렸다. '염력'은 갑자기 초능력이 생긴 아빠 류승룡(석헌)과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빠진 딸 심은경(루미)이 세상에 맞서 상상초월 능력을 펼치는 이야기를 그린다. 지난해만 2편의 영화를 선보인 바 있는 심은경은 '여배우 실업난' 속에서도 단단히 입지를 굳혔다.
남자 영화만 가득한 충무로에서 여자 배우들이 일자리를 잃은 지 오래다. 지난해 '아이캔스피크(김현석 감독)'의 주연배우 나문희를 제외하곤 두각을 나타낸 여배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정우·이병헌 등이 연달아 영화를 개봉시킬 때, 다수의 여자 배우들은 아예 출연을 하지 못하거나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덩달아 일부 장르에만 국한된 한국 영화판의 기형적 성장이 많은 우려를 낳기도 했다.
2018년은 여성 배우들에게 중요한 해가 될 전망이다. 남배우들 못지 않은 여배우의 흥행력을 증명하는 과제를 해결해야 남성의 보조자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특히 가장 주목받는 20대 여배우이자 '리틀 포레스트'의 주연 1번으로 나서는 김태리의 흥행 성적은 여배우의 티켓 파워를 입증하는 첫 척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연기 경력 53년차, 70세의 여배우 윤여정은 "요즘 영화에 남자들만 나오더라. 최근에 본 '1987'도 김태리만 여자고, 남자만 떼로 나온다. 어떤 현상인 거다. 때가 지나면 여자들이 기량을 펼치는 세상이 올 거다"고 말했고, 한 영화계 관계자는 "여성 영화도 많은 관객들이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에 투자고 되고 제작도 될 것이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