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 관계자들이 모이기만 하면 약속이나 한듯 쏟아내는 말이다. 신사적인 영화계? 옛말이다. 침묵이 준, 쇼윈도 이미지였다. '상상 이상'의 굵직한 사건·사고는 영화계에서 터지고 있다. 아수라장이다.
불륜부터 감독 갑질, 성추행도 모자라 동성 성폭행이라는 역대급 파문까지 불거졌다.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의 불륜 고백을 이길 이슈는 전무후무 할 것으로 여겨졌지만 사실상 개인사인 불륜보다 영화계 전반의 문제로 각인된 동성 성폭행의 후폭풍이 더 거세다.
김기덕 감독의 폭행과 강압적 디렉팅에 대한 여배우A의 폭로, 이수성 감독과 곽현화의 법적공방, 조덕제와 여배우B의 진흙탕 싸움 등은 모두 '성(性)'이 문제화 된 사건들이다. 차곡차곡 쌓인 해당 사건들은 국내에서도 이른바 '미투(Me too)' 운동을 불러 일으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미투 운동'은 지난해 할리우드 유명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국내에서 이미 2년 전부터 문화계 전반에 걸친 성폭력 사건 고발 운동이 있었다. 할리우드의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우리 안의 문제가 곪아 터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특히 최근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의 폭로가 국내 미투 운동 동참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 동료 동성 감독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감독이 내막을 폭로하면서 영화계가 먼저 발칵 뒤집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간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들에 대한 강제적 조치가 없었다는 것. 법의 테두리를 떠나 영화계 내의 자정 작용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쉬쉬하기 바빴다. 여감독 A 사건이 주목받는 이유는 영화계가 처음으로 가해자에게 '제명'과 '수상박탈'이라는 초강수를 뒀기 때문이다.
동성 성폭행의 주범 여감독 A는 2년 여에 걸친 재판 끝에 지난해 12월 대법원으로부터 준유사강간으로 징역2년, 집행유예 3년, 성폭력교육 40시간 이수 명령 판결을 받았다. 선후 관계를 확인한 한국영화감독조합과 여성영화인모임은 5일 조합원 제명과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수상 박탈을 공표했다.
6일 영화진흥위원회는 내·외부 인력 포함 자체 조사단을 통한 진상조사 착수 계획을 밝혔다. 영진위 측은 "여감독 A 뿐만 아니라 관련 인물들과 책임자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가 이뤄질 것이다.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논의도 같이 진행될 예정이다"고 공지했다.
이와 관련 피해 감독 측은 일간스포츠에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하고 발빠른 대처에 감사하다. 가해자의 직접적인 사과는 여전히 없지만 이번 사례를 계기로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추가 입장을 전했다.
여감독 A와 피해 감독을 협박·회유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소속 지도 교수는 일주일 째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충무로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들에 따르면 여감독 A 사건이 공론화 된 후 비슷한 사건 피해자들의 고발이 잇따르고 있다는 후문이다. 때문에 영화계 내에서도 관련 법률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함께 대처 방안 체계가 확실히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 관계자는 "영화계 내 성문제 이슈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더 이상 침묵이 답은 아니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 만으로도 긍정적 변화를 내다보게 만든다"며 "사건이 발생할 때만 반짝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변화가 힘들더라도 장기적인 관심이 필용하다. '관례'라는 단어가 악용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