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축구 천재'가 아닙니다. 발톱이 곪아서 빠질 정도로 엄청나게 노력했던 선수일 뿐이죠."
이영표·박지성보다 먼저 네덜란드 에레디비지 PSV 아인트호벤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 한국 축구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의 역사를 일군 감독. 축구인 허정무(63)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를 설명하는 수식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희미해지는 법. 유니폼은 한참 전에 벗었고 지휘봉마저 내려놓은 지금은 '그때 그 시절의 허정무'보단 한 명의 축구인이자 행정가인 허정무로 더 익숙하다.
기억은 희미해지더라도 사진은 남는다. 케케묵은 사진첩 속에서 꺼낸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 오랜만에 감독 허정무, 행정가 허정무가 아닌 '선수' 허정무를 다시 불러냈다. JTBC3 FOX Sports의 2018년 신규 프로그램 <사.담.기> (매주 월요일 오후 11시)가 옛 추억이 담긴 사진들과 함께 1980년대 한국 축구의 중심이었던 '허정무 선수'와 만났다.
'사진에 담긴 숨은 이야기'라는 뜻의 <사.담.기> 는 사진관 컨셉트의 스튜디오에 스포츠 스타가 출연해 소장하고 있던 '인생사진'들을 보며 자신의 삶을 더듬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시간이다. 허 부총재는 12일 오후 11시에 방송될 <사.담.기> 에서 선수 시절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풀어놓는다.
학교에 가고 싶었던 진도 허가 7남매 중 넷째
"축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뭐하는 운동인지도 몰랐어요. 그저 공 차는 놀이인 줄만 알았지."
관사 앞에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이 찍은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며 허 부총재는 그렇게 읊조렸다. "처음에는 학교에 가고 싶어서 축구를 시작했다. 중학교까지 공부하다 1년을 쉬었는데 그때 진도군에서 하는 체육대회에 중학교 축구선수로 나갔다. 지금 말하는 소위 '부정선수'였다(웃음)"고 말문을 연 허 부총재는 "체육대회에서 축구하던 날 발견한 게 바로 허윤정 삼촌"이라고 덧붙였다. 1960년대 홍콩 세미프로에 진출했던 허윤정씨가 한눈에 허 부총재의 재능을 알아본 것. "너 축구 한번 해 보지 않겠냐"라는 허씨의 제안에 우연찮게 시작한 축구가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 '바늘구멍'이 됐다. 어지간한 수재가 아니면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던 시절, "축구를 잘하면 장학생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은 어린 허 부총재의 마음을 흔들었다. 장학생으로 뛸 수 있다는 말에 한달음에 서울까지 갔지만 일은 호락호락하게 풀리지 않았다. 허 부총재는 입학이 어렵다는 말에 그대로 돌아가자는 아버지를 "6개월만 시간을 달라"고 설득해 서울에 남았다. 아직도 기억에 선연한 그날이 바로 1969년 1월 17일이다. 그리고 새벽잠까지 포기하며 발톱이 곪아 빠질 정도로 노력한 끝에 3개월 만에 주전으로 올라섰고, 축구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고대 차범근-연대 허정무, 우리 사이는?
허 부총재 하면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름이 바로 차범근(65) 전 감독이다. '고려대의 차범근, 연세대의 허정무'에서 시작한 둘의 관계는 해외 진출 뒤 각각 독일-네덜란드에서 뛰면서 '유럽파 라이벌'로 조명받았다. 하지만 허 부총재는 "선수로서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라며 '라이벌' 얘기에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축구선수답게 승부욕까지 없었던 건 아니다. 허 부총재는 "대표 생활을 같이하면서 세밀한 플레이 등에서 지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차범근 선배가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것이 (네덜란드행에) 영향을 줬다"고 털어놨다.
"유럽은 한국 선수를 전혀 모를 때고, 막연하게 초청장을 들고 테스트를 받으면서 돌아다니던 시대다. 구단들이 교민들을 상대로 '누가 축구를 잘하냐'고 물어서 제의가 오고 그랬다"고 얘기한 허 부총재는 "결혼한 지 5일 만에 아인트호벤, 빌레펠트 두 군데 초청장을 들고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고 설명했다. 막상 독일에 도착한 허 부총재는 빌레펠트에 가지 못했다. 공항에서 기다리던 교민들이 그의 손을 끌고 독일 보훔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테스트에 통과한 허 부총재는 보훔에서 계약 제의를 받았다. 허 부총재는 "그래도 이왕 온 거니 아인트호벤도 가 보겠다고 해서 네덜란드로 갔고, 거기서 나를 마음에 들어 해 계약했다"며 아인트호벤 진출 에피소드도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