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포털사이트에 걸린 ‘러-美 아이스하키, 미·소 냉전시대 만큼 치열했다’는 제하의 중앙일보 기사에 달린 한 댓글이다.댓글 600여개 중 중계편성에 대한 항의가 많았다.
지난 17일 오후 9시10분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 겨울올림픽 아이스하키 남자 예선 러시아 출신 올림픽선수(OAR) 대 미국의 경기. 경기장은 마치 검투사들이 목숨 걸고 결투를 벌이는 콜로세움 같았다. 미·소 냉전시대부터 아이스하키계 라이벌이자 정치적으로도 얽혀있는 양국은 주먹다짐도 불사할만큼 치열한 승부를 펼쳤다.
하지만 국내 팬들은 이 경기를 TV 생중계로 보지 못했다. 같은 시간 지상파 3사는 모두 쇼트트랙 여자 1500m와 남자 1000m를 생중계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콘텐트를 내보냈다. ‘효자 종목’인 쇼트트랙은 국민적 관심이 가장 큰 종목이다.
하지만 ‘겨울스포츠의 꽃“ 아이스하키를 보고 싶은 시청자들은 3사가 똑같은 경기를 중계하는데 대해 ‘전파 낭비’ ‘국뽕 편성’이라고 반발했다. 남북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에 비해 남자 아이스하키 중계는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지적도 있다. 스키점프처럼 메달권이 아닌 종목은 녹화중계되기도했다.
현재 영국 웨일즈에 머물고 있는 체육철학자 김정효 박사는 “영국의 올림픽 TV중계권자인 BBC는 자국 메달 여부에 관계없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올림픽의 거의 모든 종목을 중계한다. 나도 이곳에서 윤성빈(스켈레톤)과 임효준(쇼트트랙)의 금메달 따는 모습을 생중계로 봤다. 영국은 스키 종목이 약한 편인데도 중계를 해준다”고 전했다.
반면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 스포츠 칼럼니스트인 신무광씨는 “일본은 NHK와 네 곳의 민영방송사가 올림픽 중계를 하는데, 주로 일본선수 출전경기를 생중계한다. 여자 아이스하키와 컬링은 일본 경기만 중계한다. 일본이 출전하지 않은 남자 아이스하키의 경우 결승과 3-4위 결정전만 NHK가 중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같은 시간에 TBS가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TV아사히가 컬링 남자 일본-스웨덴 전을 나눠서 중계했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청한 한 지상파 방송사의 기자는 “지상파 3사가 아이스하키·컬링처럼 조별리그 경기 수가 많은 종목은 추첨을 통해 번갈아 중계하기로 했다. 하지만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스켈레톤 등 한국의 금메달이 유력한 종목은 동시에 중계하기로 합의했다”며 “TV 시청률이 광고 매출로 직결돼 어쩔수 없는 선택이다. 최민정이 금메달을 딴 쇼트트랙 여자 1500m 경기 생중계 시청률은 55.4%(지상파 3사 합계)나 나왔다”고 말했다.
한 지상파 방송사의 홍보팀 관계자는 “국민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걸 중계하는 게 방송사의 임무다. 크로스컨트리, 바이애슬론 같은 종목도 있지만, 아무래도 시청자들은 한국 선수가 잘하는 종목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김유겸 서울대 교수(체육교육학)는 “국민들이 다양한 경기를 볼 수 있는 게 이상적이다. 하지만 인기있는 종목의 중계를 포기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방송사들 입장에선 국민의 다양한 볼 권리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시청률과 수익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효 박사는 “상업방송 행태를 무조건 잘못됐다고 비판할 순 없다. 공영방송인 KBS는 국민이 낸 시청료로 운영되는 만큼, 올림픽 중계도 문화적 다양성의 측면에서 접근해, 여러 종목들이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 당시 주방송사였던 BBC는 인터넷 등 다양한 플랫폼과 채널을 통해 동시간대에 열린 다양한 경기를 중계방송했다. 런던올림픽 당시 영국 현지에 머물렀던 한 체육계 관계자는 “다양한 종목을 보고 싶은 시청자들의 요구가 있는 만큼, 국내 방송사들도 BBC의 사례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