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판 문화계다. 누군가는 출국을 금지당했고, 누군가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으며, 누군가는 강제 아웃팅을 당해야 했다. 스케일이 커진 '미투(Me Too) 운동'의 명과 암이다.
끝나지 않는 미투 운동이다. 끝나지 않아야 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새로운 소식은 끊임없이 들려오고, 문화계는 자체 자정작용에 돌입했다. 하지만 장기전의 발목을 잡는 미꾸라지도 존재한다. '청정한' 미투 운동을 위해서는 이유 불문, 명확한 사실관계가 밑바탕돼야 한다. 벌써부터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곽도원에 이어 이해영 감독까지 벌써 두 번째다.
지난 4일 오후에는 배우 한재영과 이해영 감독의 성추행 의혹이 불거졌다. 한재영은 연극배우 시절에 후배에게 고발당했고, 이해영 감독은 지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재영의 미투 고발자는 SNS를 통해 본인의 실명과 이름, 가해자의 실명도 당당히 공개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이해영 감독의 고발자는 '4metoo***'라는 SNS 계정에 초성으로 글을 남겼다.
당사자들의 반응도 달랐다. 4일 늦은 오후, 피해자의 글을 접한 한재영은 언론에 입장을 표명하기 전에 피해자와 먼저 연락을 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변명하고 해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 '사과'였다. 5일 오전 6시 피해자와 전화 통화 연결이 된 한재영은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피해자는 미투 고발자 중 처음으로 '가해자를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글을 먼저 올렸다. '한재영 배우가 열심히 연기하는 모습을 봐도 이젠 아플 것 같지 않습니다'라는 대목은 피해자의 포용심과 한재영의 진정성을 동시에 가늠케 한다.
한재영은 피해자의 글이 올라온 뒤 소속사를 통해 사과문을 발표했다. 모든 사실을 인정했고 사죄했다. 과거에 피해를 입힌 것이 맞고, 자숙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지만 사과의 선후 관계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미투 운동을 통한 긍정적 효과의 좋은 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이해영 감독은 '소송'을 언급했다. 네티즌들은 미투 운동을 통해 이해영 감독과 관련된 이야기를 처음 접했지만 이해영 감독은 이미 2년 전부터 '협박'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이해영 감독은 '성 소수자'라는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원한 커밍아웃이 아닌 명백한 아웃팅이다.
이해영 감독은 '나는 성소수자다. 게시자는 약 2년 전부터 성 정체성과 인지도를 약점으로 이용해 지속적인 협박을 해 왔다.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한 협박과 허위 사실을 담은 언어 폭력을 가해 왔다. 이제는 개인적인 피해를 넘어 공적인 명예가 실추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강압적인 방식으로 내 의사와 무관하게 나의 성 정체성이 밝혀지고, 허위 사실 유포로 인해 내 명예가 실추되는 상황을 간과하지 않겠다. 나의 인권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동안 받아 온 협박과 정신적 피해에 대한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강력한 법적 대응을 시작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미투 운동의 스케일은 연극계를 넘어 영화계 범위가 더 커지는 모양새다. 매일 밤 터지는 미투 운동으로 인해 관계자들은 잠을 못 이루고 있다. 이미 터진 사건들을 수습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새로운 폭로들이 넘쳐 나고 있다. 배우·감독·제작자를 막론하고 관련인이 언급되는 순간, 작품 자체가 흔들린다. 고발 대상자 한 명이 책임져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해영 감독 역시 올 상반기에 '독전' 개봉을 준비 중이다. 배급사와 제작사, 출연 배우들의 소속사들은 고발 글이 올라온 뒤 즉시 비상에 걸렸다. 감독의 '입'을 기다릴 수밖에 없기에 발을 동동 굴렀다. 이해영 감독의 고백으로 상황은 급변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 늘어나고 있다.
연극계와 가요계도 빠지지 않는다. 미투 운동의 시발점인 이윤택 연출은 결국 출국 금지를 당한 채 경찰 조사를 받는다. 서울지방경찰청 측은 "성폭력 혐의로 고소된 이윤택씨에 대해 5일 오후 2시30분에 긴급 출국 금지를 요청했다. 5일 오후 2시30분부터 12시간 동안 출국 금지되고 향후 법무부 승인 시 한 달간 출국이 금지된다"고 밝혔다.
포크송 가수 강태구는 전 연인에 대한 데이트 폭력 논란에 휩싸였다. 강태구의 전 연인 A씨는"'2012년부터 2016년까지 3년 반의 연인 관계를 이어 가는 동안 강태구로부터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A씨에 따르면 강태구는 A씨의 옷차림과 행동을 꾸준히 지적하며 폭언을 일삼았고, 강제로 포르노를 시청하기를 종용했다.
네 번째 폭로자까지 등장했지만 남궁연은 요지부동이다. 남궁연은 법률대리인을 앞세워 '민형사 고소를 진행할 것이다. 아직 폭로자가 특정되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 뒤 법적 대응을 할 것이다'는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두 번째 피해자가 등장한 뒤 꼬리를 내린 오달수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법정 다툼은 이제 시작이지만 남궁연은 이미지 추락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미투 운동의 스케일이 커지면서 고발 글이 범람하고 대상자들도 확대되고 있다. 대부분 즉각 사과로 대응하고 있지만 미투 운동에 의한 피해자도 발생했고 법적 대응을 진행하는 이들도 생겼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며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에 과도기를 겪는 것은 당연하다. 돈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투 운동은 지지돼야 마땅하고 무엇보다 악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고심과 고민은 분명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