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투수 김정후(30·개명전 김경근)의 야구인생은 버라이어티 그 자체다. 양현종(KIA) 김광현(SK) 이용찬(두산) 등과 함께 2006년 제22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당시 포수)지만, 경동고 졸업 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 단국대 졸업 후엔 또 한 번 드래프트에서 미끄러졌다. 가까스로 상무야구단에 들어갔고, 2013년 드래프트에서SK 유니폼을 입었다. 기대가 컸던 선수는 아니다. 지명 순위가 마지막인 10라운드(전체 87순위)였다.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이만수 전 SK 감독은 2013년 시범경기 때 새 얼굴을 발탁하기 위해 한동민·이명기(현 KIA) 김도현(현 두산) 등 경험이 많지 않은 선수 위주로 무한경쟁 시스템을 이어갔다. 당시 김경근이라는 이름으로 시범경기 4번 타자로 그라운드를 밟기도 했다. 이 감독은 빠른 배트 스피드와 타석에서의 적극성에 높은 점수를 줬다. 그해 정규시즌에도 5경기를 뛰었다. 하지만 4타수 무안타 기록을 남기고 1군에서 자취를 감췄다.
부상을 이유로 SK를 떠난 김정후는 이름까지 개명하면서 새출발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이후 투수로 전향해 일본 사회인야구와 독립리그를 거쳤다. 그리고 테스트를 거쳐 두산 유니폼을 입었다. 교육리그에선 주눅 들지 않고 과감하게 공을 던지면서 코칭스태프 눈도장을 찍었다. 김태형 두산 감독은 21일 시범경기 잠실 한화전이 한파로 취소된 뒤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보는 것보다 공이 (포수 미트에) 더 빠르게 들어온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아직 '투수' 김정후는 미완성이다. 시범경기 2경기에 출전해 평균자책점 9.00을 기록했다. 22일에는 2군으로 이동했다. 막연하게 기회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 그는 "어디에 있더라도 감사한 마음이다.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타자가 아닌 투수로 뛰고 있는데. "SK 소속이었던 2014년 2군 스프링캠프 때 왼 어깨를 다쳤다. 중견수와 2루수, 우익수 사이에 떨어지는 바가지 안타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우익수로 슬라이딩 캐치를 하다 어깨가 그라운드에 찍혔다. 극상근 손상에 연골까지 다쳤고, 탈골까지 됐다. 많은 시간을 재활군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쉽게 낫지 않더라. 타격하면 통증이 계속 왔다. 그래서 타자를 그만뒀다."
-SK에서 방출된 건 언제인가. "2014년 겨울이다. 그해 1년 내내 재활을 하다가 견디지 못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어깨 상태도 좋지 않았다. 운영팀장 면담에서 '나가서 재활하고 싶다'고 했다."
-투수 경험은 있었나. "아니다. SK를 나오고 야구를 그만둔 상태로 1년 동안 집에만 있었다. 그러던 중에 고등학교 때 투수코치였던 곽채진 감독(언북중)을 만났는데, '왼 어깨를 다쳤다고 해서 야구가 끝난 것은 아니다. 오른팔은 멀쩡하니까 공을 던져보라'고 하시더라. 그때 구속이 147km까지 나왔다. 이후 일본에 가서 사회인야구부터 독립리그까지 해보라고 에이전트까지 소개해주셨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2016년 3월쯤 일본으로 건너갔고, 사회인야구를 했다. 그리고 점점 자신감을 얻게 됐다." -자신감을 찾은 계기가 있었나. "사회인야구팀에 있을 때 외국인 선수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둬 공백이 생겼다.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정식경기 선발로 등판했다. 팀에서는 '5이닝만 던지라'고 주문했는데, 9이닝 19탈삼진 완봉승을 거뒀다. 점수가 1-0이었는데, 1점도 내가 친 홈런이었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해 11월 일본에서 전국적으로 치러진 독립리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지명(니가타 알비렉스)을 받았다."
-독립리그에선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사회인야구에서 1년 정도 투수를 하니까 팔꿈치에 뼛조각이 생기더라. 시즌 개막이 3월이었는데, 재활이 그때까지 다 되지 않았다. 즉시 전력감으로 뽑는 외국인 투수였는데, 공을 못 던진 것이다. 팀에서 '이렇게 되면 우린 못 쓴다'고 해서 귀국했다. 그게 2017년 5월쯤이다. 이후 넥센, LG 그리고 두산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그리고 두산에서 잘 봐주셔서 지난해 계약을 했고, 교육리그를 소화했다."
-신인 드래프트 10라운드 지명받았고, 많은 우여곡절도 경험했다. 견딜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첫 번째는 부모님이다. SK를 나와 1년을 쉬면서 집에서 폐인 같은 생활을 했다. 개인방송 BJ까지 해봤다. 부모님이 고생하시는데, 용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여자친구도 힘들 때 날 잘 붙잡아 줬다."
-기약 없는 2군 생활을 보낼 수 있다. "어디에 있더라도 감사한 마음이다. 일본 독립리그에서 3각 김밥 하나에 물 1.5L를 먹어가면서 야구를 해봤다. 세금 빼면 월급 150만원 정도를 받았는데, 월세 내고 밥 먹고 하면 남는 게 없었다. 한국에 돌아오니까 너무 좋아 살이 찌더라. 감사함을 느낀다. 열심히 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개명을 한 이유가 있나. "대학교 때부터 이름이 조금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고 하더라. SK에서 시범경기 4번 타자도 치고 그랬는데, 실제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부모님이 새로운 이름을 알아봐 주셨고, SK에서 방출된 후인 2014년 말에 개명했다."
-'타자 김경근'에 대한 미련은 없나. "그것 때문에 투수 전환을 늦게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어깨가 좋으니까 투수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게 타자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존심에 타자를 버리기 쉽지 않았다. 지금은 왜 투수를 늦게 했나 후회도 된다."
-구속은 어느 정도 나오나. "20일 경기(잠실 한화전)에선 149km까지 찍혔다. 지난해에는 151km까지 던져봤다. 변화구로는 슬라이커, 포크볼, 컷패스트볼을 던지는데 주무기는 직구다."
-SK 시절 내야 땅볼을 치면 1루까지 전력 질주를 했는데. "맞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야구를 했다. 내가 이만큼 간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야구였다. 투수랑 싸워야 하는데, 내 자신과 겨루고 있더라. 전력질주는 양준혁 선배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중하고 행복했다."
-투구폼이 다이나믹한데. "오승환 선배 동영상을 정말 많이 봤다. 계속 보니까 따라 하는 것보다 그 선수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 대학교(단국대) 선배다.(웃음)"
-김정후의 야구 인생은 지금 몇 회인가. "한 5회쯤이 아닐까. 새로 시작하는 클리닝 타임. 투수 나이는 이제 한 살,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