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대표팀, '신태용호'의 조별리그 3경기가 모두 끝났다. 결과적으론 '탈잘싸(탈락해도 잘 싸웠다)'가 됐지만, 독일전 승리에 마냥 기뻐할 수 없는 과제는 여전히 산적해있다.
조별리그 3경기를 치르는 동안 신태용호는 전쟁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부상자들이 즐비한 선수단, 연이어 밀려드는 더 강한 적들 그리고 대표팀에 쏟아진 비난의 십자포화까지. 그라운드 위에 서서 이 모든 것들과 싸웠던 선수들은 물론, 지켜보는 팬들도 덩달아 지치고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대표팀 베이스캠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스웨덴과 맞붙었던 니즈니노브고로드, 멕시코전이 열린 로스토프나도누, 독일전을 치른 카잔까지 러시아 길거리엔 서로의 국기를 휘날리며 응원가를 부르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새벽까지 쉴 새 없이 이어졌는데, 유독 우리는 축제가 아닌 전쟁 같은 시간을 보냈다.
월드컵은 세계인의 축제라는데, 한국이 월드컵을 축제로 즐겼던 적은 원정에서 16강 진출을 달성했던 2010 남아공월드컵이 끝인 듯하다. 물론 축제의 정점엔 2002 한일월드컵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뒤로 월드컵은 4년마다 찾아오는 '스트레스 유발자'가 됐다. 감독은 감독대로, 선수는 선수대로 그리고 팬들은 팬들대로 월드컵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영표(41) KBS 해설위원의 말대로 "기쁨이 돼야 하는 월드컵이 4년마다 팬들에게 스트레스가 되고 있는 셈"이다.
조별리그가 끝난 지금, 월드컵이 왜 '기쁨'이 아닌 '스트레스'가 되고 있는지 짚고 넘어가야 할 시점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가장 큰 문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겠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색깔'을 잃었다는 점에 있다. 이천수(37)는 1차전 스웨덴전이 끝난 뒤 일간스포츠 관전평을 통해 "이길 수 있었고, 또 반드시 이겨야 했던 경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우리만의 '색깔'이 없었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본 이들의 의견도 대체로 같았다. '한국 축구' 하면 떠올랐던 악착같은 모습, 상대보다 더 많이 뛰고 강하게 압박하며 투지로 물고 늘어졌던 모습이 희미해졌다는 평이다.
이번 대회 '첫 단추'자 16강 진출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스웨덴전 패배에서 가장 강렬하게 드러난 문제점이다. 당장 선수들이 조금이라도 더 뛰고 상대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였던 멕시코전은 '졌지만 잘 싸웠다'는 평가가 나왔다. 손흥민(26·토트넘)의 기적적인 후반 추가시간 만회골까지 터지면서 등 돌렸던 팬심도 어느 정도 돌아왔다. 실낱같은 16강 진출 가능성을 위해 죽기 살기로 뛴 독일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팬들은 한국 축구 특유의 색깔을 그리워하고, 우리가 잘하는 것으로 세계 무대에서 배짱을 보여 주길 바란다. 스웨덴전에서 신태용호가 조금 더 배짱 있게 나갔다면 대표팀도 팬들도 스트레스를 덜 받았을지 모른다.
한국 축구가 색깔을 잃은 배경에 대한축구협회의 안일함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영표 위원은 "2014 브라질월드컵 때를 생각해 보라. 그때나 지금이나 대회 1년 전에 감독을 해임하고, 또 새로운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이 같았다"고 비판했다. 4년 전 최강희(59) 전 감독이 최종예선까지 '시한부 체제' 사령탑을 마치고 나서 협회가 홍명보(49) 전 감독을 부랴부랴 선임한 것이 대회 개막을 1년 남짓 남겨 둔 시점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울리 슈틸리케(64) 전 감독을 대회 1년도 채 남겨 두지 않은 상황에서 경질하고 신태용(49) 감독을 다급하게 월드컵 대표팀 사령탑에 앉혔다. 공격 축구를 추구하던 신 감독의 '색깔'은커녕, 성적에 대한 부담감으로 한국 축구의 색깔도 이어 가지 못하게 한 악수였다.
이런 요소들이 얽히고설켜 월드컵을 향한 관심 저하로 이어졌다. 가뜩이나 대중의 관심에서 밀려나고 있는 한국 축구에 월드컵은 4년마다 찾아오는 '특수'였는데, 이번엔 그마저도 영 효과가 미미했다. 대표적인 수치가 바로 시청률이다. 이번 월드컵은 한국과 6시간 시차인 러시아에서 열려 대부분 경기가 '황금 시간대'에 편성됐다. 1차전 스웨덴전은 지난 18일 월요일 오후 9시, 2차전 멕시코전은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24일 새벽 0시에 시작했다. 3차전 독일전도 27일 수요일 오후 11시에 열려 대부분 사람들이 무리 없이 경기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시청률만 보면 새벽과 아침 시간대에 열렸던 4년 전 브라질월드컵보다 하락했다. 브라질월드컵 첫 경기였던 러시아전은 회사원들의 출근 시간대인 평일 오전 7시에 킥오프했는데 지상파 3개 사 시청률 합계가 52.5%에 달했다. 반면 이번 1차전 스웨덴전은 40.9%로 4년 전보다 10% 이상 낮았다. 가장 완벽한 시간대로 꼽혔던 멕시코전 역시 3개 사 합계 34.4%로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그나마 가장 뚝심있는 축구를 보여준 독일전이 시청률 60.96%(실시간 기준)로 선방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월드컵을 다시 기쁨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모두 밖으로 뛰쳐나와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게끔 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 이영표 위원과 박지성(37) SBS 해설위원은 "우리나라 모든 축구인들이 반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영표 위원이 "선수들은 현상일 뿐이다. 원인은 모두에게 있다"고 얘기한 것처럼 박지성 위원도 "10년 이상 한국 축구의 미래를 내다보는 수준의 반성과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반성을 촉구했다. 축구계 전체가 노력하지 않으면 잃어버린 기쁨은 되돌아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