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대표팀은 아시안게임 3연속 우승을 노린다. 그러나 항상 환희의 순간만 만끽한 것은 아니다.
1998 방콕아시안게임. 처음으로 프로 무대에서 뛰는 선수들이 참가한 대회다. 당시 LA 다저스의 주축 투수로 올라선 '코리안 특급' 박찬호, 1996시즌 리그 신인왕 박재홍, 대학생이었던 김병현 등이 합류했다. 파죽지세로 결승에 오른 한국은 이전 대회(1994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내준 일본을 상대로 13-1, 콜드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박찬호는 7이닝 1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마운드 위에서 배터리를 이룬 조인성과 함께 승리의 순간을 맞았다.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제14회 아시안게임에서는 명실공히 '드림팀'이 구성됐다. 김인식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고 이승엽·이종범·송진우·이상훈 등 리그 최고 선수들이 승선했다. 결승전 상대는 대만. 접전이 이어졌다. 1-0으로 앞선 3회초 연속 안타를 맞고 역전을 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4회 공격에서 김종국의 적시타와 밀어내기 볼넷 그리고 상대 투수의 폭투로 3득점하며 다시 앞서갔다. 8회 추격을 허용하는 적시타를 내준 송진우가 9회를 실점 없이 막아 냈다. 4-3 승리. 야구 열기가 가장 뜨거운 도시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기대에 부응했다.
대회 3연패는 실패했다. 이른바 도하 참사. 김재박 감독이 이끈 대표팀은 이전 대회 전력에 버금가는 대표팀을 구성했다. 그러나 한 수 아래로 평가됐던 대만에 2-4, 이어 한일전에서도 7-10으로 졌다. 훗날 빅리거가 된 류현진, 오승환이 모두 부진했다. 최종 성적은 3위. 당시 일본은 사회인 야구선수를 주축으로 구성된 대표팀이었다. 방심이 초래한 참사로 여겨졌고, 비난이 쏟아졌다. 프로 야구 침체기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시련은 국제 대회에 나서는 선수단 자세를 바꿔 놨다.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09 WBC 준우승 등 좋은 결과를 이어 갔고, 2010 광저우 대회에서도 자존심을 회복했다. 추신수(당시 클리블랜드), 이대호, 김태균 등 최근까지 국제 대회 주축으로 활약한 황금 세대가 총출동했다. 결승에서 대만에 9-3으로 완승을 거뒀다. 추신수는 3홈런 11타점을 기록하며 공격을 이끌었다. 대표팀은 4년 뒤 인천에서 열린 2014 대회에서도 대만에 신승을 거두며 2연패를 달성, 첫 3연패의 교두보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