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김현수(30)가 국가대표 세대교체 선봉장을 맡았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야구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국가대표 주장' 계보를 잇는다.
선동열 국가대표팀 감독은 지난 18일 야구대표팀 첫 단체 훈련에서 김현수에게 주장 완장을 채웠다. 김현수는 2008 베이징올림픽부터 이번 대회까지 무려 7차례나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주장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8년 대표팀 막내였던 그가 10년 뒤인 2018년 대표팀 주장으로 우뚝 섰다.
대표팀 주장은 소속팀 주장보다 더 어려운 자리일 수도 있다. 각 팀에서 내로라하는 스타 선수들이 모여 대표팀을 이룬다. 처음으로 함께 뛰게 된 이도 많다. 이 선수들을 한데 묶어 소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소속팀 주장보다 할 일이 많지 않지만, 임무는 충분히 막중하다.
내로라하는 전설적 선배들이 주장 자리를 거쳐 갔다. 프로 최정예 멤버가 출전했던 첫 국가대표팀은 1998 방콕아시안게임에서 닻을 올렸다. 당시 주장은 심재학 넥센 코치. 당시 LG에서 뛰고 있던 심재학은 리더십과 친화력 면에서 주위에서 인정받는 선수였다.
2000 시드니올림픽에서는 김기태 KIA 감독이 주장을 맡아 한국 야구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수확하는 데 일조했다. 지금도 고참 선수들이 '형님'이라고 부를 만큼 카리스마 넘치는 포용력을 갖고 있는 김 감독이다. 굵직굵직한 스타 선수들이 즐비한 대표팀 주장에 적역이었다.
이종범 MBC SPORTS+ 해설위원은 모범적인 주장의 좋은 예다. KIA에서 주장으로 뛰던 시절, 2002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 주장을 처음 맡았다. 당시 한국은 금메달로 영광을 이어 갔다. 그리고 4년 뒤 열린 초대 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은 주장 이종범의 위용을 그라운드 안팎에서 널리 알린 대회였다. '군기 반장'을 자처하면서 첫 WBC를 경험하는 대표팀 선수들을 하나로 묶었고, 4강 진출의 발판이 됐던 2라운드 일본과 경기에선 당시 일본 최고 마무리 투수였던 후지카와 규지를 상대로 좌중간 2타점 결승 적시 2루타를 때려 냈다.
이 위원은 "나뿐 아니라 모든 선수들이 국가를 위해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후배들에게 유니폼 뒷면의 이름보다 앞면에 새겨진 '코리아(KOREA)'를 먼저 생각하자고 당부했다"고 회상하면서 "주장은 아무리 잘하고 싶어도 친구·동료의 신뢰가 없으면 안 된다. (나는) 많이 부족했는데 동료들이 너무 잘해 줬다"고 했다.
한국 남자 구기 종목 가운데 금메달을 최초로 수확한 2008 베이징올림픽 8전 전승 우승 당시 주장은 진갑용 삼성 코치였다. 포수 선배였던 김경문 당시 대표팀 감독은 주저 없이 진갑용에게 주장 완장을 맡겼고, 대회가 끝난 뒤 주장에게 남다른 고마움을 표현했다.
사실 진 코치는 이 대회에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쿠바와 결승전에도 진갑용 대신 강민호가 선발 포수로 나섰다. 하지만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한국이 끝내기 역전패 위기에 몰렸던 9회말 1사 만루서 강민호가 퇴장 명령을 받자 진갑용이 무릎을 절룩거리며 다시 마스크를 썼다.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 정대현과 힘을 합쳐 공 3개만으로 천금 같은 병살타를 솎아 냈다.
이 위원과 진 코치는 이번 대표팀에 선수가 아닌 코칭스태프로 합류해 '태극마크'와 남다른 인연을 뽐냈다. 심지어 이종범의 아들 이정후는 대표팀 선수로 발탁돼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국가대표로 활약하는 명장면을 연출하게 됐다.
이들 외에도 많은 선수들이 대표팀 주장을 거쳐 갔다. 국가대표 명외야수로 활약했던 박재홍 MBC SPORTS+ 해설위원은 마지막 태극마크였던 2006 도하아시안게임에서 주장을 맡았고, 손민한은 한국이 준우승했던 2009 WBC 대표팀 주장이었다.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선 LG 봉중근이 주장으로 활약했고,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선 넥센 박병호가 국가대표 사상 첫 '20대 주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한화 정근우도 '모범 주장' 가운데 한 명이다. 국가대표 붙박이 2루수였던 그는 2015 프리미어 12에서 처음으로 주장 완장을 차 초대 우승을 뒷받침했다. 두산 김재호는 두산 소속 선수 8명이 출전했던 2017 WBC에서 다시 한 번 '젊은 주장'의 명맥을 이었다.
잠실=배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