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수살인’을 시작하며 선언한 게 있어요. 적어도 이 영화에 ‘폭력미학’은 없다. 살인마에 아무도 모르게 희생당한 이들을 찾아 나선 형사의 얘기잖아요. 누군가의 딸이고 아들이고 엄마였을 피해자들의 가족을 그리는데, 살인마 캐릭터를 강화한단 명목으로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건 모순이라 생각했죠.”
두 번째 장편영화 ‘암수살인’으로 개봉(3일) 일주일 만에 손익분기점 200만 관객을 돌파한 김태균(47) 감독의 말이다. 그는 “제가 거장도 아니고 (흥행을 위해) 좀 자극적으로 찍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제작사와 배우들, 투자‧배급사가 영화의 방향에 동의해줬다”면서 “일단 믿고 투자해준 분들에게 손해가 안 가서 다행이다. 기존 상업영화와 다른 점이 있는 영화라 좀 더 많은 관객이 보고 공감해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영화는 살인죄로 복역 중 일곱 건의 추가 살인을 자백하는 죄수 강태오(주지훈 분)와 이를 파헤치는 형사 김형민(김유석 분)의 맞대결을 다루지만, 잔혹한 범죄 묘사를 앞세운 여느 스릴러와는 다르다. 교묘하게 거짓말을 일삼는 강태오와 심리 싸움을 벌이며 이미 백골이 된 피해자들을 찾아 나선 김형민 형사의 여정을 부각한다. 신고도 수사도 없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른바 ‘암수(暗數) 범죄’가 사회의 무관심이 낳은 비극임을 강조한 것이다.
6년 전 자전적 데뷔작 ‘봄, 눈’을 선보였던 김태균 감독은 같은 해 말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우연히 이 영화의 토대가 된 부산의 실제 범죄 사건에 대해 알게 됐다. 다음날 그는 무작정 부산에 가 사건을 담당한 김정수 형사를 만났다.
실제 사건의 어떤 점에 끌렸나.
“이분의 수사는 보통 살인사건 수사와 정반대였다. 죽였다는 살인범의 자백이 진실인지 알 수 없으니 역 수사로 피해자가 있는지 찾아야 했다. 취재해보니까 그 살인범이 많은 형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형사님이 관심을 가진 것이었다. 이미 복역 중인 살인범의 여죄보단 지금 당면한 사건에 집중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묻힐 뻔한 사건을 끄집어낸 것이다. 왜 이렇게 어려운 수사를 하느냐고 물으니 ‘피해자가 있고 유족이 있으니 한다’고 하더라. 세상에 이런 형사가 있어 다행이다. 이 영화를 꼭 해야겠다, 결심했다.”
실화를 옮기며 어려웠던 점은.
“실제 이야기는 방송에서 다뤄진 것보다 광범위하고 파편적이었다. 영화를 개연성 있게 구성하는 것이 첫 번째 숙제였다. 처음 1년간 김정수 형사와 10차례 만나며 주변 동료들, 취재원부터 취재했고 실제 살인범이 자백한 살인 리스트를 중심으로 두세 배 정도의 사건 케이스를 분석했다. 2016년 판결이 내려지기까진 제 시나리오도 엔딩 없이 달렸다. 여러 버전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는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영화는 완전히 극화된 이야기”라 거듭 말했다. 가령 영화에서 김형민 형사가 강태오에게 살인 단서를 얻으려 금전을 줬다는 건 극적 긴장을 위한 허구다. 강태오가 작성한 살인 리스트는 실제 살인범이 자백했던 11개 살인항목을 토대로 최대한 각색했다고 했다. 검사 캐릭터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꾸는 등 주변 인물들은 상상을 보탰지만, 주인공 캐릭터의 본질만은 지키려 했다.
부유한 집안 출신에, 골프 치는 형사는 한국영화에서 드물다.
“실제 김정수 형사에게서 가져왔다. 시간 관계상 영화에 빠진 장면 중에 형사가 강태오와 심리 싸움을 하고 와서 골프에 굉장히 집중하는 장면이 있었다. 실제 형사님이 골프 할 때 살인범과의 대화를 복기하면서 다음 수사계획을 세웠다더라. 22년차 베테랑 형사인데, 만났을 때 첫인상부터 강력계 형사의 전형적인 모습과 달랐다. 재킷 차림에 사람을 대하는 예의가 느껴졌다. 이런 작은 결이 캐릭터에 자연스레 입체감을 줬다.”
강태오를 절대 악이자, 무관심이 낳은 또 다른 비극으로 묘사했는데.
“가장 오래 고민한 캐릭터다. 드러난 빙산의 일각만 갖고 다 이해하는 것처럼 그냥 사이코패스로 그리는 건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계층적으로 바닥에 있고 감정선이 급격히 변하는 인물, 자갈치시장 시궁창에서 탄생한 괴물로 좁혀갔다. 이 괴물도 주변에서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좀 더 빨리 비극이 멈추지 않았을지 상상했다. 암수살인이 무관심이 만든 비극이었던 것처럼.”
개봉 전 극중 한 살인사건의 실제 피해자 유족이 유족 동의 없이 만들어진 영화라며 상영금지가처분신청을 냈다가 제작진의 사과를 받아들여 조건 없이 고소를 취하한 것도 법정에서 영화를 보고 이런 제작 취지에 공감해서였다. 영화가 공개된 후엔 호평이 우세하지만, 살인사건을 다루며 유가족의 동의를 받지 않은 데 대해선 비판 여론이 남아있다. 김태균 감독은 “한동안 포털사이트를 열어보지도 못할 만큼 힘들고 무거운 자책감을 느꼈다”며 “앞으로 실화 모티브 영화들은 고민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가장 힘이 돼준 건 22년 지기 황기석 촬영감독(‘친구’ ‘형사 Dualist’)과 총제작자이자 스승 곽경택 감독이다. 곽 감독의 데뷔작 ‘억수탕’에 조감독으로 참여하며 맺은 인연이 이번 영화까지 이어졌다. 김태균 감독은 “전작 ‘봄, 눈’은 큰 누님을 암으로 떠나보낸 내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다 보니 다른 사람은 몰라, 하며 20세기 독재자처럼 배우들과 스태프를 다그쳤다. 결과적으론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 줬나, 후회했다”면서 “이번 영화는 윤석 선배, 지훈씨, 모든 스태프에게 귀를 열고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하나하나 찾아갔다. 필름시대 영화의 기운이 느껴져 좋았다”고 했다.
영화에서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칼국수집 장면은 실제로도 김윤석과 주지훈이 함께한 첫 촬영. 주지훈이 처음 강태오 분장에 나선 국밥집 장면에선 이미지가 상상과 달라 예정보다 빨리 즉석에서 삭발을 감행해야 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주 배우가 감정을 딱 채워 나타났을 땐 저 모습이다, 싶어 모니터 화면을 카메라로 캡처했다”고 그는 돌이켰다.
“대학로에선가 김 감독을 처음 만났을 땐 전도하러 온 줄 알았어요(웃음). 안경 끼고 삐쩍 마른 사람이 차분하고 말수가 적었죠. 되게 신중하단 느낌. 그런 사람이어서 이렇게 밀도 있는 시나리오를 쓸 수 있구나, 생각했죠.” 김윤석의 귀띔이다. “윤석 선배가 요즘도 자주 그 얘길 한다”며 웃은 김태균 감독은 “김정수 형사가 영화의 토대가 된 사건을 맡아 판결을 받기까지 6년 걸렸는데 저도 영화를 시작해서 개봉까지 꼭 그만큼 걸렸다. 형사님은 아직도 남은 피해자들을 찾고 있다”고 했다. “돌아보면 영화엔 아쉬운 부분만 보여요. 앞으로 더 치열하게, 동시대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영화로 소통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