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지난 4일 새벽 향년 81세로 타계했다.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에 전념해왔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신성일은 한국영화계 전무후무한 스타였다. 시작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였다.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 스타덤에 올라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로 사랑받았다. 다른 남자 배우들이 중후한 이미지로 활동하던 당시 그는 카리스마 있는 반항아 이미지로 인기를 모았다.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불타는 청춘'(1966) 등에 출연하며 한국영화계에 없어서는 안 될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주연작만 500편이 넘었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개봉한 1194편의 작품 중 324편이 그의 출연작이었다. 그와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춘 여배우만 119명에 달했다.
연기 뿐 아니라 제작과 연출에도 도전했다. '연애교실'(1971),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을 제작하고 연출했다. '그건 너'(1974)를 연출하고, '코리안 커넥션'(1990), '남자시장'(1990), '물 위를 걷는 여자'(1990),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안개 속에서 2분 더'(1995) 등을 제작했다.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화려한 수상 경력도 따라왔다.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청룡영화상 인기상을 받았고, 1968년에는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90년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1994년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 2004년 대종상영화제 영화발전공로상의 주인공이 됐다. 가장 최근인 2008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특별공로예술가상, 부일영화상 영화발전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영화인 외길만 걸은 것은 아니었다. 11대, 15대 총선에서 낙선했고, 2000년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폐암 투병 중에도 신성일은 영화인의 길을 걸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레드카펫을 걷고 인터뷰에 응하는 등 활약했다. 당시 취재진에게 "나는 딴따라 소리를 들으려고 영화계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신을 느낀다. 종합예쑬 속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영화 '행복', '바람으로 그린 그림' 등을 기획 중이라는 투병 이후의 구체적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1964년 당대 최고의 톱 배우 엄앵란과 결혼한 고인은 장남 강석현씨, 장녀 강경아씨, 차녀 강수화씨 등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4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6일 진행되며 장지는 경북 영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