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전 10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故) 신성일의 영결식과 발인식이 엄수됐다. 가족과 친지, 영화계 인사들 7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영결식은 배우 독고영재의 사회로 치러졌다. 개식사, 영정입장 및 운구, 묵념, 김두호 홍보위원장의 약력 보고, 추모영상 상영, 지상학 장례위원장의 조사,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의 추도사, 유가족과 영결식에 참석한 전원의 분향 및 헌화, 엄앵란의 유가족 대표인사, 독고영재의 폐식 선언으로 진행됐다.
추도사에 나선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은 "불과 한달전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 위를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오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여기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모두를 챙겨 바라보던 눈빛은 영화인들의 무한한 든든함이었다"라며 고인을 추억했다. 이어 "선생님께서는 너무나 많은 추억을 두고 우리 곁을 떠났다. 500편이 넘는 수많은 영화들 속에 가장 아름다운 별이 됐다"며 "영화인으로서 후배들에게 힘이 돼주신 선생님. 영화만을 위해 살아가셨던 열정을 잊지 않겠다. 선생님께서 살아가신 영화를 치열하게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영결식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은 엄앵란은 이날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와주셔서 감사하다"며 "가만히 앉아서 사진을 보니까 '당신도 늙고 나도 늙었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소회를 밝혔다. 이어 "이 세상 떠나면서 울면서 보내고 싶지는 않다. 누가 보면 날더러 '왜 안 우냐'고 한다. 그런데 울면 망자가 걸음을 못 걷는다더라"라면서 "신성일이 다시 태어나서 산다면 이젠 선녀같이 동경하며 그러고 살고 싶다. 부인들에게 잘 하라. 잘하면 기쁨이 온다"고 이야기했다.
이어진 발인식에서 안성기와 이덕화가 가장 앞에서 관을 들었다. 가족들의 부축을 받은 엄앵란이 뒤를 따랐다. 나한일 등 후배 배우들도 여러 영화계 인사들도 장지인 경북 영천으로 떠나는 고인을 배웅했다.
신성일은 지난 4일 새벽 전남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81세. 지난해 6월 폐암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아왔고,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1937년 출생한 신성일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이자 원조 미남 배우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작품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고, 신상옥 감독으로부터 지금의 예명을 받아 본명 강신영이 아닌 신성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64년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활동하던 배우들이 중후한 매력을 가졌던 것과는 다르게 신성일은 카리스마 있는 반항아 이미지로 사랑받았다. 청춘 스타로 자리매김한 후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불타는 청춘'(1966), '별들의 고향'(1974) 등 무수히 많은 히트작을 남겼다.
1960~1970년대 영화계는 신성일이 없이는 존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개봉한 1194편의 작품 중 324편이 그의 출연작이었다. 평생동안 주연작만 500편 이상을 남겼고, 119명의 여배우와 연기 호흡을 맞췄다.
많은 활동을 한 만큼 화려한 수상 경력도 가지고 있다. 1964년 제7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시작으로,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영화제, 아시아영화제, 황금촬영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 국내 다수의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영화사에 전무후무한 배우였다. 부산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지난해 펴낸 책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에서 박찬욱 감독은 그에 대해 "이토록 한 사람에게 영화산업과 예술이 전적으로 의존한 나라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없었다"며 "신성일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영화사는 물론 한국 현대문화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고 평했다.
1964년 당대 최고의 톱 배우 엄앵란과 결혼한 고인은 사생활 문제로 대중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2011년 일간스포츠에 7개월간 연재한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묶어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를 펴낸 그는 1970년대 아나운서 겸 연극배우였던 고 김영애와 외도했던 경험을 털어놔 파장을 일으켰다. 엄앵란과는 20년 넘게 별거하기도 했으나 2016년 엄앵란의 유방암 투병 후 서로를 돌보며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한 방송에서 엄앵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변하지 않고 의지하는 기둥이다"며 부부의 특별했던 관계를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