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눈으로 바다 너머에 있는 북한 땅을 보니 기분이 묘해진다. 온 동네가 과거에 멈춘 듯한 느낌도 든다. 분단되기 전 북한과 교류가 활발했던 당시의 흔적을 보며 실향민들의 아픈 마음을 전해 들으니 먹먹해지기도 한다.
곧 통일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얼기설기 집을 지어 모여 살았다는 곳, 분단으로 아직도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 인천광역시 강화군을 찾았다.
과거의 기억이 머무는 곳, 교동도
강화군 교동면에 들어가려면 검문소에서 해병 제2사단의 출입증을 받아야 한다. 민간인 통제선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 그만큼 가깝다는 의미기도 하다.
군인들에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이름과 연락처를 적으면 차량 출입증을 발급해 준다. 차 내부를 검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제법 긴장되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강화도와 연결된 교동대교를 건너 조금 달리면 금세 ‘교동제비집’이 보인다. 교동도 여행의 출발은 이곳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동제비집은 KT에서 통신망이 불안한 교동도에 사회공헌활동으로 망을 구축해 주고, 최첨단 기술을 접목해 지어 준 관광 안내소다. 교동도에 제비가 많다는 데서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교동도 관광 안내뿐 아니라 관광객이 직접 등장하는 사진으로 교동에서 연백까지 가상의 평화 다리를 만들어 볼 수 있고, 주인공이 돼 직접 교동신문을 발행해 보는 체험도 해 볼 수 있다.
교동제비집에서 5분도 채 되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대룡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윤경 인천관광공사 강화지사장은 “교동도 사람들의 고향은 대부분 황해도 연백군이었는데, 전쟁 때 내려와 고향 사람들과 모여 살며 생계를 꾸리게 된 곳이 대룡시장이 됐다”고 설명했다.
대룡시장은 아직 1970년대의 모습을 간직했다.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이 정취를 느끼기 위해 관광객들이 주말이면 모이는 곳으로 떠올랐다.
대룡시장은 1960~1970년대의 이발관과 영화관의 모습이나 흑백사진을 통해 학창 시절로 돌아가 볼 수 있는 사진관까지 곳곳이 과거를 보여 준다. 특히 교동스튜디오는 추억의 옛날 교복을 입고 흑백사진을 남길 수 있는 체험 공간으로, 많은 관광객이 남긴 사진들이 가득해 눈길을 끌었다.
또 대룡시장은 제비가 찾아오는 청정 지역이다. 관광 안내소가 교동제비집인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대룡시장에서는 돌아오는 제비들을 환영하듯 곳곳에 위치한 제비 모형을 볼 수 있다. 상점 처마 아래의 제비집들을 망가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도 다시 돌아오는 제비들을 위한 배려일 것이다.
강화군은 이 재래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골목마다 ‘제비거리’ ‘조롱박거리’ ‘극장거리’ 등 골목을 구분해 뒀다. 이 골목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도 재미일 듯하다. 또 대룡시장 내 ‘동산약방’ ‘중앙신발’ ‘거북당’ ‘교동이발관’ 등 스탬프 투어도 가능하다.
강화에 남은 분단 이전, 그때 그 시절
대룡시장에서 30여 분간 달려 도달한 곳은 ‘강화평화전망대’다. 남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3층 조망실에 오르니, 망원경을 통해 북한 땅이 선명히 보였다. 맨눈으로도 바다 건너 북한의 하얀 집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으니, 가늠은 안 되지만 꽤나 가까운 거리일 것이다.
보이는 곳은 서면 개풍군 해창리와 삼달리, 송악산과 개성공단이 있는 개성시의 모습과 좌측에 과거 연백군으로 불렸고 연백평야가 넓게 펼쳐진 황해남도의 연안군과 배천군이 있다.
날씨가 좋을 때는 북한 주민들이 농사를 짓는 모습, 학교, 마을 회관이 보인다고 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은 사람들이 살기도 하지만, 일부는 위장 마을이라는 설명도 나왔다. 겨우 2.3㎞를 두고 갈라진 한 민족의 현실이 와닿는 곳이다.
평화전망대의 이용료는 성인 2500원, 청소년·군인 1700원, 어린이 1000원이며 겨울철(12월~2월)에는 1시간 앞당겨 오후 4시에 매표를 마감한다.
평화전망대 외에도 북한은 강화 곳곳에 남아 있다. 분단되기 이전에 북한의 개성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윤 지사장은 “개성 방직 기술자들이 강화에 방직공장을 세우면서 지금도 그 공장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중 ‘소창’이 당시 개성의 영향을 말해 준다. 소창은 아기들 기저귀감으로 썼던 직물을 말한다. 강화도는 소창 산업이 꽃피며 과거 섬유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10년대 직물 기기가 개량되면서 한 집 건너 하나씩 직물과 관련된 일을 했을 정도라고 했다. 이후 1940년대 후반 ‘중앙방직’ ‘심도직물’ ‘이화직물’ ‘평화직물’ 등 유명한 직물 업체들이 모두 강화도에 터를 잡으며, 크고 작은 직물공장에서 인조견·넥타이·커튼직물·특수면직물 등을 생산했다.
이후 직물 산업의 중심지가 대구로 이전되면서 강화군은 당시의 심도직물 건물 굴뚝을 소창길 길목에 전시, 터는 용흥궁 공원으로 조성했다. 또 평화직물터를 인수해 현재 소창을 직접 만지고 만들어 볼 수 있는 소창 체험관을 마련했다.
일본 가옥의 분위기가 풍기는 소창 체험관이다. 우연히 배우 장근석이 이곳에서 촬영한 것이 알려지며 일본인 관광객들이 다수 찾는 곳이 됐다.
여기에서 소창에 그림을 그려 손수건을 만드는 체험부터 직접 직물을 짜는 직조 체험까지 가능하다. 주말에는 강화도 특산품인 화문석과 특산차 체험을 시간대별로 마련해 두고 있으니, 이를 통해 강화도를 직접 느껴 보는 것도 좋다.
강화에서 역사 흔적 찾기도
강화도에서 가장 독특한 문화유산을 꼽는다면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을 이야기할 수 있다. 1896년 고종 때 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1900년 11월 15일 이곳에 한국 최초의 한옥 성당이 세워졌다.
‘성베드로와 바오로 성당’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건축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이색적인 곳이다. 익숙한 한옥이 2층 건물로 높이 올라가 있고, 내부는 로마의 바실리카양식을 본떠 지어 놓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한국에 서양 건축이 도입되던 시기의 초기 건축으로,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특징이다. 구조와 외관에 한국 전통 건축양식을 적용해 ‘외래 종교’라는 거부감을 완화한 것이다.
성당 앞의 큰 보리수나무 역시 의미를 같이한다. 1900년 영국 선교사 트롤로프 신부가 보리수나무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인데, 불교를 상징하는 보리수나무를 성공회 성당 앞에 심으면서 한국의 토착 불교와 조화를 이루겠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성당 바로 옆의 용흥궁에서는 철종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았던 곳이다.
원래는 초가였으나, 보위에 오른 뒤 건물을 새로 지어 지금은 아담한 기와집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