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수년 전 본인의 입으로 "총액 5억 달러 계약을 원하다"고 했던 브라이스 하퍼의 FA(프리에이전트) 계약은 말잔치로 가득했다. 이적 시장이 열린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몇 달을 끌어오던 계약은 2월 21일을 기점으로 본격화됐다. FA 시장에 함께 풀렸던 내야 최대어 매니 마차도의 행선지가 결정된 뒤였다. 마차도는 샌디에이고와 계약 기간 10년, 총액 3억 달러에 사인했다. 하퍼는 필라델피아와 계약 기간 13년, 총액 3억3000만 달러라는 메가톤급 계약을 성사시키며 신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불과 며칠 만에 마차도의 계약을 뛰어넘으며 자존심을 살렸다.
메이저리그 기록이다. 2014년 11월 지안카를로 스탠튼(현 뉴욕 양키스)이 마이애미와 계약했던 총액 3억2500만 달러(계약 기간 13년)를 넘어서며 리그 역사를 새롭게 썼다. 기존 최고 기록을 500만 달러 차이로 깬 것이다. 워낙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선수고 계약 규모와 기간이 엄청나 수많은 뒷얘기가 쏟아지고 있다.
하퍼의 계약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현재 선수들의 기간 선호도다. FA 시장에 불확실성이 가득 차면서 '짧게 뛰고 다시 대박을 노리자'는 생각이 줄어든 느낌이다. LA 다저스는 하퍼에게 전무후무한 연평균 연봉 4500만 달러짜리 계약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메이저리그 선수 중 연평균 연봉이 가장 높은 선수는 잭 그레인키(애리조나)로 3441만 달러다. 다저스 제시 금액은 그레인키의 연봉을 1000만 달러 이상 웃도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계약 기간이 4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저스는 스물여섯 살에 불과한 하퍼가 4년 동안 큰돈을 챙기고 다시 FA 시장에서 더 큰 계약을 노릴 수 있다는 전략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하퍼는 연평균 액수가 2600만 달러를 살짝 넘는 필라델피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장기간 안정을 선택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가 제시한 계약 기간 12년, 총액 3억1000만 달러는 필라델피아 제안에 미치지 못했다.
하퍼의 계약 수준은 스포츠 세계에서 어느 정도일까. 역대 2위에 해당한다. 1위는 지난해 프로복서 카넬로 알바레스가 DAZN과 한 계약이다. 알바레스는 5년 동안 11경기를 하는 조건으로 3억6500만 달러를 받는다. 연평균으로 보면 7300만 달러다. 2위는 하퍼. 3위와 4위는 앞서 언급한 스탠튼과 마차도다.
그 뒤에 최근 콜로라도와 연장 계약한 놀란 아레나도(계약 기간 8년 총액 2억6000만 달러), 2000년말 텍사스(계약 기간 10년 총액 2억5200만 달러)와 2007년말 뉴욕 양키스(계약기간 10년 총액 2억7500만 달러)를 번갈아가면서 10년 계약을 따낸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이름이 있다. 8위는 디트로이트의 미겔 카브레라(계약 기간 8년·총액 2억4700만 달러). 9위는 로빈슨 카노와 알베르토 푸홀스가 따낸 계약 기간 10년·총액 2억4000만 달러다. 10위가 돼서야 NBA 휴스턴의 '득점 기계' 제임스 하든의 이름이 등장한다. 계약 기간 6년·총액 2억2800만 달러다. 계약 총액 톱10 중 대부분이 메이저리그 소속이다.
그렇다면 과감하게 큰 액수를 베팅한 필라델피아의 이유는 뭘까. 성적 향상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의 영입에 따른 수입 증가 역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이번 겨울 필라델피아는 공격적으로 움직였다. 하퍼와 계약하기 전 앤드루 매커친과 J. T. 레얼무토·진 세구라 등 검증된 선수를 다수 영입하면서 성적에 대한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시즌 티켓 홀더가 9500명에서 1만1200명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그리고 하퍼의 계약이 공식 발표된 뒤 24시간 안에 무려 10만 장 이상의 티켓이 더 팔렸다. 필라델피아의 지난해 평균 티켓 가격은 36달러 정도로 리그 전체 9위. 단순 계산으로만 360만 달러의 과외 수익이 이미 확보된 셈이다. 이 수익은 시즌 성적이 잘 나와 준다면 더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구장에서 소비하는 맥주·음료수·핫도그·기념품 등의 액수도 만만치 않다. 구단은 이미 전화 예약과 티켓 판매 부스 운영 시간을 늘리며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
장기 계약에 대한 선수들의 선망과 스타 파워를 통한 성적과 수익 향상을 원하는 팀 그리고 여전히 최고 대우를 받는 메이저리그 분위기 등이 종합적으로 반영돼 하퍼가 올 시즌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