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한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본 함유선(35)씨 말이다. 함씨는 지인의 추천을 받아 농심 '미역듬뿍초장비빔면'을 맛보기 위해 마트에서 제품을 구입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제품을 먹으려던 순간, 구입한 제품이 삼양 '미역새콤비비면'인 것을 알아차렸다. 함씨는 "이미 제품의 포장을 뜯어 바꿀 수 없었다"며 "농심 라면을 먹으려고 했는데 제품 포장과 이름이 헷갈려 잘못 사고 말았다. 왠지 속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미역에 꽂힌 라면 업계…이름도 포장도 비슷
식품 업계의 '미투(Me Too) 제품' 관행이 도를 넘어선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투 제품은 경쟁 업체의 인기 제품을 모방한 유사 제품을 일컫는다. 일종의 표절이지만, 식품 업계에 모방 제품이 워낙 많다 보니 미투 제품이 업계 관행으로 자리 잡아 이제는 일상화된 것처럼 여길 정도다.
대표적 사례가 올여름 비빔면 시장을 겨냥한 라면 업체들의 신제품 경쟁이다.
실제 농심은 올해 여름 라면 신제품으로 4월 20일 '미역듬뿍 초장비빔면'을 내놨다. 농심은 여름 비빔면이 면과 비빔 소스만으로 구성된 점에서 탈피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건더기 스프로 활용할 재료를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라면개발팀 연구원들이 건강식으로 비빔면에 '미역'을 곁들여 먹는 요리법을 온라인에서 접했다. 연구원들은 온라인 요리법을 한 단계 발전시켜 초록색 미역 분말이 가미된 면발 개발에 들어갔다. 미역의 '알긴산' 성분이 쫄깃한 면발 식감을 만든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들은 6개월간 전국 미역 산지를 돌며 제품에 들어갈 미역을 골랐고, 그 지역에서 만든 미역 초무침을 모두 먹어 보면서 소스 연구에 몰두했다.
농심 관계자는 "지난 1년간 세상에 없는 신개념 비빔면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개발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농심이 약 1년의 개발 기간을 거쳐 선보인 신제품은 곧바로 다른 업체들의 신제품 소재가 됐다.
오뚜기와 팔도가 약속이라도 한 듯 지난달 각각 '미역초비빔면'과 '미역초무침면'을 선보였다. 이에 삼양식품 역시 지난달 29일 '미역새콤비비면'을 내놨다.
이로써 국내 라면 업체 모두 미역을 소재로 한 라면 신제품을 내놓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대형 마트의 한 직원은 "요즘 비슷한 제품명에 디자인도 유사한 비빔라면이 너무 많다"며 "겉모습만 보고 매대 진열을 잘못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주류 업계도 발포주 미투 논란
미투 제품은 식품 업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주류 업계 역시 경쟁 업체들의 인기 제품을 앞다퉈 복제해 내놓는다.
맥주 업계 1위 오비맥주가 올 초 선보인 신제품 발포주 '필굿'이 대표적이다. 이는 하이트진로의 '필라이트'와 매우 유사하다는 '미투 제품' 논란이 일었다.
오비맥주는 "필굿은 시원하고 상쾌한 아로마 호프와 감미로운 크리스탈 몰트를 사용해 맛의 품격과 깊이를 더한 것이 특징"이라며 "사전 소비자 조사에서도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가벼운 목 넘김' '깔끔한 끝 맛' '마시기에 편안한 느낌' 등 측면에서 높은 선호도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대형 마트에서 '12캔에 1만원'에 판매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또 "수차례 사전 소비자 조사"를 진행했다며 소비자 조사를 매우 강조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오비맥주의 필굿이 하이트진로의 필라이트와 매우 유사하다고 본다. 하이트진로는 2017년 4월 업계 최초로 발포주인 필라이트를 출시한 바 있다. 일본 등에서 발포주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하이트진로가 국내 최초로 선보인 것이다. 필라이트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출고가 덕분에 '12캔에 1만원'에 판매돼 소비자들 사이에서 가성비가 좋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부진을 겪는 하이트진로의 신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는 모습이었다. 필라이트는 출시 이후 1년 6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 4억 캔을 돌파했다.
업계에서는 오비맥주가 필라이트의 높은 인기와 발포주 시장의 확대를 보고 뒤늦게 필굿을 내놓은 것으로 본다.
실제 필굿은 필라이트와 여러 면에서 유사한 부분이 많다.
브랜드명에서 '필라이트'와 '필굿'이 매우 유사하다. 영문 표기도 'FiL'로, 영어 소문자와 대문자가 같다. 심지어 글씨체마저 매우 유사하다.
또 하이트진로는 필라이트를 출시하며 코끼리 캐릭터를 내세웠는데, 오비맥주는 필굿에 고래 캐릭터를 사용했다. 하이트진로는 필라이트에 코끼리 캐릭터를 사용해 마케팅 효과를 크게 본 것으로 전해졌다. 가정용 시장에 진출해 '12캔에 1만원'이라고 알린 전략도 매우 유사하다고 업계는 본다.
주류 업계 한 관계자는 "이해하기 힘들다. 경쟁 회사에서 발포주 제품을 내놓을 수는 있지만, 브랜드명과 필체·프로모션까지 유사하다는 점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식품·주류 업계에서 미투 제품 생산은 하나의 판매 전략으로 자리매김한 게 사실"이라며 "기업 입장에서 모방 제품 출시는 초기 개발비가 적게 들고, 이미 다져진 시장에 쉽게 진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끌리는 선택지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소송 제기해도 패소하기 일쑤…"특허 등록해야"
물론 미투 제품을 놓고 법적 공방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제품 모방으로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원조 업체가 승소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앞서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과 팔도의 '불낙볶음면'이 그중 하나다. 2014년 삼양식품이 법원에 표절을 이유로 팔도의 불낙볶음면 판매 금지 가처분 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법원은 "두 제품의 포장이 유사한 점은 있으나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라며 기각 이유를 밝혔다. 소송 과정에서 팔도 측은 오히려 볶음면 시장 확대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이보다 앞서 오리온은 1974년 초코파이를 출시한 뒤 롯데 초코파이(1979년 출시)에 대해 상표 등록 취소 소송을 벌였다가 패소한 사례도 있다.
전문가들은 식품 업계의 무조건적 표절을 방어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특허권 등록을 꼽았다. 디저트 전문 업체 소프트리는 2013년 자사가 개발한 벌집 아이스크림에 대한 디자인 특허를 취득했고, 2015년 경쟁사와 부당 경쟁 행위 및 디자인 침해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음식물 제조도 특허권 등록이 가능하다"며 "사안마다 다른 부분이긴 하지만, 제조 방법이나 기술에 대한 특허를 내서 받아들여지면 일정 부분 권리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통 업계 한 관계자는 "미투 제품이 관행이 돼 버린 이면에는 한국 식품 업체들의 연구 개발에 대한 투자 의지가 그만큼 적다는 현실이 반영돼 있다"며 "현재보다 제품 개발에 1~2% 더 비용을 들인다면 표절 관행을 상당 수준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