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팬들이 제 플레이를 보며 열광할 수 있게 막고 태클하고, 기회가 오면 골까지 넣겠습니다. '달구벌 판 다이크'로 불리는 날이 오도록 할 거예요."
프로축구 대구 FC 수비수 정태욱(22)은 오랜만에 웃었다. 정태욱은 지난 8일 대구 포레스트 아레나(DGB대구은행파크)에서 열린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F조 5차전 멜버른 빅토리(호주)와 홈경기에서 팀 승리를 확정하는 쐐기골을 박았다. 1-0으로 앞서던 후반 8분 강윤구의 코너킥을 194cm의 정태욱이 훌쩍 날아올라 헤딩슛으로 연결했다. 멜버른 골키퍼가 가까스로 막아 낸 볼이 재차 그의 앞에 떨어지자 오른발슛으로 침착하게 골 망을 갈랐다. 프로 1호 골. 기세가 오른 대구는 김대원(후반 35분) 정선호(후반 38분)가 추가골을 터뜨리며 4-0 대승을 거뒀다.
경기 전까지 조 3위였던 대구는 이날 승리로 승점 9점을 기록하며 2위로 올라섰다. 대구는 오는 22일 광저우 에버그란데(중국·승점 7)와 조별리그 최종 6차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각 조 1·2위가 진출하는 16강에 오른다. 같은 조 1위 산프레체 히로시마(일본·승점 12)는 16강을 조기 예약했다. 이튿날인 9일 대구 삼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태욱은 "평소 훈련에서 자주 연습했던 약속된 플레이였다. 경기 전 안드레 감독님이 (강)윤구 형에게 코너킥 상황에서 내 머리를 겨냥하라고 하셨는데, 운 좋게도 실제로 골을 넣을 수 있어서 기분 좋았다"라면서 "마침 어머니께서 경기를 보러 오셨는데, 어버이날을 맞아 좋은 선물해 드릴 수 있어서 뿌듯했다. 윤구 형과 감독님에게 감사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연령대별 대표팀을 거치며 한국 축구를 이끌어 갈 차세대 중앙수비수로 꼽히던 정태욱은 프로 데뷔 시즌인 작년까지만 해도 '미운 오리'였다. 제주 유스 출신인 그는 구단의 대대적 홍보 속에 제주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그라운드에 서는 날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의 2018년 기록은 리그 5경기 출전이 전부였다. 그마저 대부분 교체 투입이었다. 제공권은 좋지만 발이 느려 팀 전술에 맞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태욱은 "기대를 많이 했던 만큼 실망도 컸다"면서도 "몸이 안 좋은 게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시간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태욱은 하루에도 두세 차례 웨이트트레이닝장으로 향해 근육량을 늘렸다. 저녁 시간에는 서귀포 시내를 뛰며 지구력을 키웠다. 스피드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 작은 보폭으로 뛰며 속도를 끌어올리는 연습을 했다. 꾸준한 노력 덕분에 2018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축구대표팀에 승선해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대구에서 그는 백조로 거듭났다. 조광래 대구 대표는 늘 준비된 자세로 기다리던 정태욱의 가능성을 알아봤다. 조 대표는 "아시안게임 대표팀 스승인 김학범 감독에게 정태욱에 대해 물어봤더니 '정말 좋은 선수다. 스피드도 갖춘 선수라서 잘 성장하면 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라면서 "김 감독의 얘기를 듣고 딱 우리팀에 필요한 선수라는 생각이 들어서 곧바로 영입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대구는 올해 1월 정우재를 내주는 트레이드를 통해 정태욱을 데려왔다.
AFC 챔피언스리그와 정규 리그 그리고 FA컵까지 병행하는 대구에서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지난달 17일 수원 FC와 FA컵 32강전에서 첫 출전 기회를 얻은 정태욱은 이후부터 주전 수비수 자리를 꿰찼다. 리그 경기만 벌써 네 차례 뛰었다. 정태욱은 "작년에 경기를 거의 못 뛰어서 대구에선 기회가 오면 반드시 잡겠다고 다짐했다"라면서 "감독님께서 기회를 주신 첫 경기에서 실수 없이 뛴 덕분이다. 제주에서 보낸 1년이 큰 도움이 됐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정태욱은 평소에는 상대 공격수를 막는 게 임무다. 하지만 세트피스나 팀이 뒤지는 상황에서는 공격수 같은 역할을 한다. 장신에서 나오는 가공할 제공권이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또래보다 키(166cm)가 컸던 안양초 6학년 때부터 헤딩 연습을 꾸준히 해 온 그는 헤딩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당당한 체격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스키선수 출신 아버지 정연호(54)씨는 184cm,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 어머니 황청윤(50)씨는 172cm다.
대구에서도 헤딩 능력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정태욱은 훈련이 끝난 뒤에도 코칭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크로스 상황에서 헤딩골을 넣는 연습을 4세트(세트당 8회) 마친 뒤에야 샤워장으로 향한다. 올 시즌만 해도 수원 FC와 FA컵 그리고 지난달 23일 산프레체 히로시마(일본)와 AFC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4차전 등 두 차례나 최전방에 섰다. 멜버른을 상대로는 프로 데뷔골까지 넣으며 '수트라이커(수비수+스트라이커)'의 면모를 과시했다. 정태욱은 "올 시즌 타점이 더 높아지고 정확해졌다"라면서 "수비수라서 그런지 골을 넣으면 무척 짜릿하다. 나도 모르는 킬러 본능이 잠재돼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정태욱의 롤모델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최고 수비수로 꼽히는 버질 판 다이크(리버풀)다. 193cm에 92kg인 판 다이크와 체격은 물론이고 골 감각까지 닮았다. 그는 매일 판 다이크의 경기 영상을 보며 공부한다고 했다. 정태욱은 "아직은 멀었다. 하지만 영상을 보며 많이 배우고 있다"라면서 "득점력은 물론이고 탄탄한 수비력까지 빼놓지 않고 눈에 담으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나도 대구의 판 다이크로 불리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정태욱은 팀의 간판스타 김대원·정승원과 1997년생 동갑내기다. 그는 "시즌 초반 승원이와 대원이가 맹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부러웠다"면서도 "동시에 큰 자극이 됐다. 서로 힘이 되는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그라운드 밖 정태욱은 평범한 20대다. 쉴 때는 극장을 찾아 어벤져스 시리즈를 보고, PC방에서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를 즐긴다. 탕수육은 최고의 힐링 푸드. 그는 이광수와 박보영의 광팬이기도 하다. 두 배우가 나온 영화와 프로그램은 모두 챙겨 보는 편이다. 꿈은 태극마크를 다는 것. 정태욱은 "팀에서 꾸준히 좋은 활약을 하다 보면 언젠가 (손)흥민이 형과 함께 뛰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날카로운 태클'과 '멋진 골' 중 어느 쪽이 떠 짜릿하냐고 물었다. 답은 간단했다.
"수비수는 태클이죠. 아무리 멋진 골도 완벽한 태클에 비할 순 없어요. 팬들이 제 태클을 보고 환호해 주실 때 살아 있다는 걸 느끼거든요. 그렇다고 골을 포기하는 건 아니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