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 이후에도 권순우(22·CJ제일제당·당진시청)의 얼굴은 밝았다. 생애 첫 출전한 윔블던 1회전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플레이를 선보였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권순우는 지난 1일(한국시간) 영국 런던 윔블던의 올잉글랜드클럽 18번 코트에서 열린 윔블던 테니스대회 1회전에서 세계 9위 카렌 하차노프(23·러시아)에게 세트 스코어 1-3(6-7<6-8>·4-6·6-4·5-7)으로 졌다. 랭킹 125위와 9위의 대결이라는 숫자에서 알 수 있듯, 세계 랭킹이나 메이저 대회 경력, 투어 대회 우승 횟수 등에서 크게 앞선 상대와 만났지만 매 세트 끈질긴 플레이로 3시간 7분 동안 분투를 펼쳤다. 1회전에서 패한 권순우는 상금 4만5000파운드(6600만원)를 받는다.
승리를 거두진 못했지만, 처음 나선 윔블던 무대에서 상대에게 한 세트를 빼앗으며 충분한 가능성을 보였다. 하차노프는 지난해 윔블던 16강, 올해 프랑스오픈 8강에 오르며 메이저 대회 경험을 쌓았고, 이번 대회에서 10번 시드를 받은 선수다. 하차노프에 비해 권순우는 지난해 1월 호주오픈 이후 2번째로 메이저 대회 본선에 올랐다. 198cm의 장신인 하차노프에 비해 180cm로 신체 조건에서도 열세였지만 끈질긴 투지를 앞세워 1세트부터 상대를 괴롭혔다.
1세트부터 경기를 타이브레이크로 끌고 간 권순우는 6-5로 앞서가고 있는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연달아 3실점을 내줬다. 2세트도 4-6으로 지면서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3세트에서 게임 스코어 2-0으로 앞서다가 내리 게임을 내줘 2-2 동점이 된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반전의 기회를 만들었다. 다시 한 게임씩 차근차근 가져오면서 5-4로 앞선 권순우는 하차노프의 서브 게임을 듀스 끝에 따내며 6-4로 3세트를 가져왔다. 이 3세트는 권순우가 메이저 대회에서 처음으로 따낸 값진 한 세트였다.
비록 경기는 졌어도 4세트에서 보여 준 끈질긴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큰 키를 앞세워 최고 시속 209km의 서브를 내리꽂은 하차노프를 상대로 게임 스코어 5-5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서브 에이스만 18개를 내주는 열세 속에서도 팽팽하게 맞섰고, 서브 최고 시속은 212km로 하차노프에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권순우는 경기 이후 대한테니스협회와 인터뷰에서 "경기를 해보니 아주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앞으로 동영상을 보면서 미리 준비하면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 넘치는 소감을 전했다.
주니어 때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권순우는 2015년 프로 데뷔 이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 2017년 챌린저 대회에서 준우승을 두 차례나 차지하면서 세계 랭킹을 300위대에서 168위까지 끌어올렸고, 지난해 주춤했지만 올해 4월 국가대표 출신인 임규태 코치를 영입하며 더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서브가 날카로워지면서 올해 챌린저대회 두 차례 우승을 차지하고 윔블던 예선에서 3연승 이후 본선에 진출하는 등 한국 테니스의 미래로 가능성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날 그가 하차노프에게 빼앗은 한 세트는 권순우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기대감을 심어 준 '100점 만점'짜리 한 세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