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손자'로 불리는 아들(이정후·21)은 언젠가 아버지(이종범·49)의 기록을 뛰어넘을 날을 머릿속에 그린다. 그 도전은 이미 시작됐고, 현재 진행형이다.
이정후(키움)는 5일 현재 시즌 안타 134개로 두산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139개)에 5개 차 뒤진 부문 2위에 올라 있다. 현재 페이스라면 시즌 막판까지 최다안타 타이틀을 놓고, 뜨거운 경쟁이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정후는 신인 시절이던 2017년 자신의 개인 한 시즌 최다안타(179개)를 경신하며 KBO 리그 최초로 동일 부문 '부자(父子) 타이틀 획득'에 도전한다.
이제는 "이정후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이 더 좋다"라는 이종범 LG 코치는 데뷔 2년 차이던 1994년 그야말로 그라운드를 휘저으며 숱한 대기록을 작성했다. 개인 타이틀 7개 부문 중 타격(0.393) 최다안타(196개) 도루(84개) 출루율(0.452) 타이틀을 차지했고, 나머지 3개 부문에서도 10위권 이내에 들었다. 24연속 도루 성공 신기록으로 공·수·주에서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무엇보다 당시 소속팀 해태가 104경기를 치른 1994년 8월 21일 타율 0.400을 기록, KBO리그 역대 최장기간 4할 타율 유지 기록(2위 2012년 8월 3일 김태균 89경기)을 갖고 있다. 타고투저가 극심했던 지난 몇 년간에도 이 기록의 주인공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이종범이 1994년 기록한 196개의 안타 역시 영원히 깨지지 않으리라고 여겨졌다. 개인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은 20년이 흘러 2014년 서건창(201개)에게 바통을 넘겼다. 다만 1994년은 126경기, 2014년은 128경기 체제였다.
야구 천재의 DNA를 물려받은 이정후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인 1994년 아버지가 기록한 안타 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정후는 "내게 아버지는 다른 친구들처럼 평범한 아빠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프로에 입단해 경기를 뛰면 뛸수록 아버지를 향한 위대함과 존경심을 갖게 됐다"라고 속마음을 밝혔다. 이어 "자식(2남)들을 위해 야구를 정말 열심히 하셨구나, 정말 대단한 선수였다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된다"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이정후가 아버지의 기록을 뛰어넘으려면 5일 현재 잔여 38경기에서 안타 62개를 더 추가해야 한다. 이번 시즌 경기당 안타는 1.31개. 이를 적용하면 산술적으로 184안타까지 가능하다. 전반기 막판 타격 페이스가 주춤했으나 최근 5경기 연속 안타에, 그 가운데 세 차례 멀티히트(한 경기 2안타 이상)로 다시 힘을 내고 있다. 최근 페이스를 끝까지 유지하며, 몇 경기 몰아친다면 충분히 도전해볼 만 하다.
정작 그는 페르난데스와 경쟁 중인 최다안타 타이틀, 또 아버지의 196안타 기록에 지금은 욕심이 없다. 그는 "솔직히 경기 수도 많이 안 남았고, 초반에 페이스가 워낙 좋지 않아 200안타 도전은 머릿속에서 아예 지운 상태다. 어떻게 하면 팀이더 이길 수 있을까, 팀이 이기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해 좋은 역할을 할까 생각뿐이다"라고 밝혔다. 특히 소속팀 키움(2위)이 최근 무서운 상승세로 선두 SK를 7.5게임 차로 쫓고 있어 이정후는 "팀이 선두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어 이에 포커스를 두며 부상 없이 풀 타임 소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종범 코치는 지난해 9월 본지 창간 49주년을 기념해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온 여홍철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 코치와 여 교수 모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아들 이정후와 딸 여서정(체조) 역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차지했다. 당시 이 코치는 "이정후에게 야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야구선수로서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쉬는 날이면 친구들과 만나거나 PC 게임을 하는 모습을 그냥 지켜본다. 이정후도 "아버지가 야구에 대해 일절 얘기를 안 한다. 예전에는 내가 뛰는 경기를 많이 보셨는데, 요즘은 퓨처스리그 경기가 오후에 열려 시간이 겹치고 LG에 몸담고 있어 1군 경기도 많이 못 챙겨 보신다"고 귀띔했다.
그런 이종범 코치가 대견스러운 아들에게 유일하게 강조하는 점은 몸 관리의 중요성이다. 200안타 돌파 여부로 초미의 관심을 끈 1994년의 아픈 경험 때문이다. 이종범은 1994년 시즌 막판 상한 육회를 먹고 식중독에 걸려 4할 도전에 실패한 건 유명한 일화다. 훗날 이종범은 "가까운 지인이 '잘 먹고 힘내라'고 생고기와 육회를 사주셔서 실컷 먹었다. 날씨가 더워 냉수를 엄청나게 마셨더니 심한 배탈이 났다. 화장실을 자주 들락날락했던 기억이 난다"라고 밝혔다. 그때 해태 지휘봉을 잡았던 김응용 감독은 "하필이면 이럴 때 식중독에 걸렸다"라며 굉장히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정후는 "아버지가 일절 야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나 '차가운 음식은 조심해서 먹고, 가급적이면 많이 먹지 않도록 해라. 먹는 것도 몸 관리다'고 얘기해주신다"고 소개했다. 이에 "잔 부상도 관리를 못 한 모두 내 불찰이다. 프로라면 부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 속에 "이번 시즌에는 다치지 않고 팀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고 웃었다.
실력으로 아버지의 명성과 무게감을 견뎌낸 이정후는 아버지도 받지 못한 신인왕을 입단 첫해 품에 안았다. 이종범은 가장 화려하게 보낸 1994년 프로 2년 차였으나 대졸 출신으로 당시 24세였고 올해 프로 3년 차를 맞는 고졸 출신으로 아직 스물한 살, 무궁무진한 성장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정후도 "아버지의 1994년 당시 나이보다 현재 내가 더 어리다"고 웃었다.
이정후는 언젠가 아버지의 기록을 넘고, 또 아버지가 뺏긴 '역대 개인 한 시즌 최다안타' 타이틀을 되찾는 것이 목표다. 그는 "언젠가 아버지의 196안타 기록을 넘어서는 것이 내 꿈이다. 또 아버지 기록을 우리 팀 선배 (서)건창이 형이 깼기 때문에 그 기록을 다시 한번 가져오는 게 내 꿈 중 한 가지다"라고 포부와 자신감을 드러냈다. 다만 이종범 코치가 작성한 1994년 타율 0.393에 대해선 "그건 절대 못 깹니다"라고 웃었다. 이 한 마디에는 '레전드 출신'의 아버지를 향한 존경과 감사함이 담겨 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뒤에서 묵묵히 응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