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고조선 논쟁’으로 유명한 유정희(남, 38, 역사학자/고고학자 :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 『하왕조, 신화의 장막을 걷고 역사의 무대로』, 『드래곤볼,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 『그레이스 켈리와 유럽 모나코 왕국 이야기』, 『러시아 역사학자 유 엠 부틴의 고조선 연구』 등을 저/감수) 선생이 직접 쓴 ‘특별기획 칼럼 ④부’이다.-
로마의 역사학자 ‘리비우스(Titus Livius Patavinus: BC 59?~AD17)’의 저서 『로마 건국으로부터의 이야기(Ab Urbe Condita Libri: ‘로마사’로 더 잘 알려짐)』에는 로마를 건설한 두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로마의 건국신화로도 잘 알려진 이 이야기의 주인공 쌍둥이 형제는 자신들을 죽이려는 찬탈자 아물리우스(Amulius)에 의해 죽음을 당할 위기에 놓이지만, 늑대의 젖을 먹으며 생존하고, 양치기에 의해 키워져 성장한다. 이 중 레무스는 후에 아물리우스에 의해 잡혀 억류당하는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그를 구하기 위해 힘을 키운 형제 로물루스가 아물리우스를 처단하고 정당한 왕위계승권을 가진 그들의 할아버지 누미토르(Numitor)를 복위시킴으로서 이들 형제는 성공의 정점에 서게 된다.
익히 알려진 이 이야기의 서사구조는 ‘아스달 연대기’의 은섬과 사야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과 뇌안탈의 혼혈인 이그트로 태어난 은섬과 사야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위기에 내몰린다. 하지만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생존하고 훗날 아스달로 돌아가 로마 건국신화의 로물루스와 레무스처럼 ‘복수’의 주역이 되고 나라를 세울 운명이기도 하다.
로물루스의 쌍둥이 형제인 레무스가 적에 의해 사로잡혀 포로 신세가 되었던 것처럼, 은섬의 쌍둥이 형제인 사야 역시 적의 성채인 아스달에 갇힌 채로 성장했다. 로마의 건국신화와 아스달 건국신화 사이의 평행이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은섬과 사야의 생모인 아사혼(추자현 분)은 아스달의 신녀였다.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어머니도 고향인 도시국가 알바론가(Alba Longa)의 신녀(vestal virgin)였다.
이처럼 아스달 건국 이야기가 로마의 건국신화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은 『아스달 연대기』의 서사구조를 예측하는데 있어 대단히 흥미로운 소재가 된다. 로마 건국신화의 주역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이야기가 피를 튀기는 ‘형제간의 살육(fratricide)’을 동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로마의 건국신화에서 할아버지 누미토르에게 잃어버린 왕좌를 되찾아준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로마의 일곱언덕으로 향해 자신들의 도시국가를 건설하려한다. 여기서 이 둘은 서로 다른 언덕을 도시건설의 적합한 후보지로 선정한다. 둘 사이의 이견을 해소하기 위해 ‘점(augury)’을 치기도 하지만 결과에 대한 해석이 달라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다. 결국 쌍둥이 형제의 갈등은 싸움으로 이어지고 레무스는 로물루스(혹은 그의 지지자)에 의해 살해당한다.[1]
마침내 홀로 살아남은 로물루스는 자신만의 도시를 건설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훗날의 대제국 로마의 시작인 것이다.
‘아스달 건국신화’의 쌍둥이 형제 은섬과 사야의 이야기와 로마의 건국설화에 담겨있는 서사구조의 전통은 보편적인 인류학적 요소를 드러낸다. 우선 형제가 힘을 모아 거대한 성취를 이루지만, 그 이야기의 끝이 형제간의 살육으로 이어진다는 서사구조는 로마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로만 범위를 한정해도 그리스를 비롯한 지중해 문명권에서 꾸준히 발견되는 공통의 문화적 자산이다. 그리스의 이야기꾼 호메로스(Homeros)의 오디세이(Odisea)에도 배다른 형제간의 살육이 등장하며, 성경에도 카인과 아벨의 살육이 등장한다.
네덜란드의 인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얀 브레너(Jan N. Brenner: 1944~ )’는 형제살해의 전통은 여러 문명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그리스와 로마 등지에서 발견되는 형제 살해는 보다 복잡한 구조를 띄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 지역에서 형제들은 공통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끈끈한 우애를 바탕으로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운명 공동체이다. 하지만 그 성공의 정점에 이르게 되면 이들은 성공의 성과물을 독차지하기 위해 형제살해라는 비극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브레너는 이런 ‘형제간의 협력→형제살해’라는 문화적 전통의 뿌리를 정치적 중앙권력의 부재에서 찾는다. 즉, 강력한 중앙권력이 부재한 도시국가적 전통을 지닌 그리스·로마 등지의 문화에서는 형제간의 야심과 권력 분배를 체계적으로 통제할 주체나 장치가 부족했기에 형제살해라는 비극적 전통이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2]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가 점점 흥미로워지는 지금, 아스달 연대기 속 국가(고조선) 건국의 과정에서 비슷한 형제살해의 모습이 드러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물론 가능성은 존재한다. 은섬과 사야는 권력을 잡겠다는 공통의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 권력이 지향하는 바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아스달 연대기에서 이런 형제살해의 전통이 재현된다면 그것은 ‘특별한 비극’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형제살해’는 도시국가의 정치 투쟁에서 흔히 일어나는 보편적인 인류학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멀리 서구의 예를 벗어나 한국의 역사적 전통으로 눈을 돌려도 형제살해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고구려 건국과정에서 주몽의 배다른 형제 대소는 주몽을 살해하려 하였다. 백제의 건국과정에서 온조와 비류는 서로 다른 땅에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과적으로 비류는 실패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 모두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예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이다. 물론 예외적인 서사구조도 존재한다.
가야의 건국설화에서 김수로와 그의 형제들은 6가야를 만들어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했다. 과연 은섬과 사야도 이런 화합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아스달 연대기의 남은 스토리가 전해주는 인류학적 수업이 무엇일지 더 궁금해지는 이유이다.
글/유정희(작가, 역사학자)
주석
[1] 리비우스는 누가 레무스를 살해했는가에 대해 정확히 전해주지 않고 있다. 본문에서와 같이 로물루스가 직접 레무스를 죽였다는 이야기와 로물루스의 지지자들이 레무스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따로 전해져 온다. 중요한 점은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직접 죽였다는 버전에서도 로물루스의 형제살해는 의도적인 범죄가 아닌 우발적 행위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즉, 그의 행위는 로마건국이라는 대의를 위한 결단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로마 공화정이 ‘제정(imperial period)’으로 넘어가는 혼돈의 시대에 로마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려는 시대적 담론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Rex Stem, “The Exemplary Lessons of Livy’s Romulus,” Transactions of the American Philological Association Vol. 137, No.2 (Autumn, 2007): 435-471.
[2] Jan N. Brenner, “The First Crime: Brothers and Fratricide in the Ancient Mediterranean,” in Greek Religion and Culture, the Bible, and the Ancient Near East (Leiden: Brill, 2008): 57-72(Chapter 4).